글쓰기, 누구나 할 수 있답니다. 당연한 이야기죠.
몇 년 전부터 심심찮게 몇몇 출판사와 기획사로부터 글쓰기와 관련한 책을 출간할 의향이 없느냐고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괜스레 멋쩍어 사양을 했습니다. 아직도 글을 쓰는 게 힘들고, 여전히 배울 게 많은 내가 누굴 가르치느냐는 이유였습니다(물론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글 쓰는 것은 힘들고, 가르치는 것은 험준한 산맥을 넘고 있습니다. 숨이 턱 막히는 여정을 가는 중입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어리석음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글쓰기를 '가르친다고’ 생각했다니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이후에 글모임을 가지면서 가르치는 게 아니라 배우는 것이라는 상투적인 말을 내가 할 줄은 몰랐습니다. 실제로 배운 게 많습니다. 서로 배워 가는 게 있으니 가르친다는 것보다 나누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능기부를 하겠다고 몇몇 사람들과 글모임을 하는 동안, 실제로 글쓰기를 하고 싶은 사람들이 겪는 문제를 좀 더 가까이, 깊숙이 들여다보게 됐습니다. 그 분들은 실제로 어떤 고민과 어려움을 겪는지 알고 싶었던 거죠. 그렇게 들여다본 그 분들의 고충은 사실 제가 겪는 그것과 다를 게 없더군요. 첫 문장을 어떻게 쓸지, 구성이나 문장은 대체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등 머리를 싸매는 일은 저나 그분들이나 매한가지였습니다. 때로는 ‘나도 겪는 고통을 한번 겪어보니 어때?’라는 짓궂은 마음이 저절로 들 만큼 글쓰기의 고통을 저에게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함께 고통을 겪는 동지가 된 셈이죠. 그 분들이나 저나 글을 쓸 때 저지르는 여러 실수들 앞에서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 이건 가르칠 게 아니라 함께 고쳐가고 배워야 하는 것이구나.”
뒤늦은 깨달음이었습니다. 덕분에 잠을 줄여가며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저의 글쓰기는 얄팍하기 그지없습니다. 아는 것도 많이 없고, 깊이도 딱히 깊지 않습니다. 주위 사람들에게도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글모임이나 강의를 할 때도 가장 먼저 하는 말입니다.
“저는 태평양만큼 이것저것 주워듣거나 본 것은 많습니다. 그러나 깊이는 딱 손가락 한 마디에 불과합니다.”
이런 자학에 가까운 고백을 하면, 사람들은 대개 웃습니다. 왜 웃을까요? 저는 그게 콤플렉스인데! 그 웃음이 당신들과 제가 그리 다르지 않은 동류라는 것을 확인하는 웃음이라면 좋겠습니다. 그런 웃음이라면 누구라도 '작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끝까지 완결성을 가지고 쓰는, 원고의 마지막 장을 쓰고 마무리하는, 나아가 책으로 출간까지 하는 ‘끝장 보는’ 글쓰기를 하는 글쟁이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제가 글쓰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보더라도 글을 쓴다는 게 누군가의 전유물은 아닌 듯합니다.
저의 글쓰기는 우연이었습니다.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집에서 빈둥거릴 때였습니다. 한 선배로부터 원고 하나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문고본 분량의 원고였는데, 50만 원을 준다는 겁니다. 슬슬 돈을 벌기 위해 이곳저곳 기웃거리던 중이었으니 냉큼 알겠다고 일을 받았죠.
열심히 썼습니다. 네. 그저 열심히 썼을 뿐, 잘 썼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돈은 주더군요. 아르바이트 삼아 한다고 생각하고 또 일을 달라고 했습니다. 마침 어느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어 아르바이트로 하기에는 좋았습니다. 투잡치고는 고급스러운 일을 하게 된 셈이죠.
그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옛 직장 동료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글 써볼 생각이 없냐고 말입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습니다. 제가 아르바이트로 글을 쓴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동료로부터 글쓰기 제안을 받으니 그때는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느닷없이, 뜬금없이 글쟁이로서의 삶을 살게 됐으니까요.
사실 혼자서 은근히 달뜬 기분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우연히 아르바이트와 동요의 제안이 시기적으로 겹쳤을 뿐인데 말이죠. 다만, 동료로부터 제안을 받았던 글쓰기는 지금껏 하던 아르바이트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출판사도 흔히 말하는 '레벨'의 차이가 컸습니다. 국내에서 상위권으로 손꼽히는 출판사 편집장님으로부터 구성작가 일을 의뢰받았던 거죠. 원고료도 50만 원에 비하면 엄청난 액수를 받았습니다.
초보가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글쓰기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10년 넘게 글쓰기로 먹고살았습니다. 분야도 가리지 않고 썼습니다. 교육 분야로 시작해서 경영, 경제, 마케팅, 인문, IT, 심리학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겁도 없이 썼습니다. 심지어 어린이 분야의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글을 처음 쓸 때는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생각보다 사실 재미있었습니다. 내가 쓴 원고가 책이 되어 서점에 깔리고, 그 책을 사다 본 사람들이 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그때는 몰랐죠. 글은 쓰면 쓸수록 힘들고 배워야 할 게 더 많다는 것을 말이죠. 저처럼 글에 인연이 없었던 사람도 '작가'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새삼스레 그 누구라도 작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함께 하는 글모임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먹물처럼 짙어집니다.
작가는 늘 시기심과 질투를 가지고 사나 봅니다. 저보다 묘사를 더 잘하고, 촌철살인의 문장을 쓰는 작가들을 보면 가슴이 아려옵니다. '아, 나는 껍데기만 작가인가……' 하고 말이죠. 글모임의 멤버들이 쓴 글에서도 감탄이 나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니까요.
사람들은 저에게 묻습니다. 작가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말이죠. 등단은 저도 하지 못했으니(논픽션 작가이다 보니)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작가 양반, 작가 소리는 어떻게 해야 듣는 거요? 자비 출판이라도 해야 되요? 그거 얼마요?"라고 물을 때도 있습니다. 실제로 글쓰기와 관련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었습니다.
글을 어떻게 쓸 것인가와 관련한 강의를 하는데, 얼마 드느냐는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분들은 과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저리도 급한 걸까요? 저의 강의가 너무 재미없었나 봅니다. 그저 읽고 생각을 다듬고 일단 쓰라는 말이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테죠. 지금도 강의나 수업을 하면 읽고 생각을 다듬고 일단 쓰라는 말밖에는 그리 할 말이 없습니다.
저는 글을 쓰려면, 우선 왜 쓰려는지 묻습니다. 저처럼 아무 준비도 생각도 없이 시작했다가 온갖 고난을 겪는 것을 방관할 수는 없으니까요. 글쓰기의 시작은 왜, 무엇을 쓰려는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 심오한 경지를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한 가지를 가지고 글을 풀어 가면 됩니다.
자, 할 말이 많아서 글로 풀려니 갑자기 첫 문장부터 막힙니다. 그래도 일단 쓰세요. 엉뚱한 말이라도 괜찮습니다. 글은 말과 달리 얼마든지 고칠 수 있잖아요. 정작 문제는 몇 줄 쓰고 난 뒤에 그리도 많던 할 말이 더 이상 떠오르지 않을 때입니다. 이때가 고비입니다. 쓸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으니 답답하죠. 펜을 놓고, 노트북이나 컴퓨터의 전원 종료에 마우스를 갖다 대는 순간입니다.
요즘은 SNS의 시대입니다. 짧게 글을 쓰고, 영상도 '짤방' 위주로 봅니다. 그렇게 짧은 메시지 전달과 수용에 적응된 상태에서 길게 글을 쓰는 것이 힘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고비를 겪는 게 비단 문장력이나 어휘력의 부족 때문일까요?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 문장이나 어휘의 문제로만 볼 수 있을까요?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를 간과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저는 얄팍한 글을 씁니다. 문장력이 뛰어나거나 화려한 어휘를 구사하는 데 모자람이 큽니다. 그럼에도 글을 계속 쓸 수 있었던 것은 문장과 어휘보다 더 중요한 뭔가를 찾아 제대로 쓰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지금껏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끝장 보는’ 글쓰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뭔가'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깃거리입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마치 대단한 비결이라도 선보이려는 듯하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뻔한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제가 글을 쓰게 된 배경과 지난 10여 년 동안 겪은 시행착오, 글모임과 강의 등을 통해 실제 글쓰기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써 봤습니다. 글쓰기와 관련한 기본적인 이야기뿐만 아니라 실제로 처음 글쓰기에 도전하는 분들의 고충과 일상의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여러분들도 주저하던 발걸음을 옮길 수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