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한 알에 대한 기억
사과 한 알.
동그랗게 잘려 나가던 끊임없던 달콤한 향기의 나선형
어릴적, 유난히 사과를 좋아하시던 엄마의 손이 아삭아삭, 원을 만들어 나갔던
그 수도 없던 오후의 공기를 기억한다.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있을 기념비적인 어느 순간들이 있겠지.
사그락 나선이 시작해서 끝나는 동안 엄마의 손은 얼마나 신기하던지,
장난스럽던 나는 나도 사과, 깎아보고 싶다. 여러번 중얼거렸지만
지금 와 떠올려보면 그건 하나의 우주였다
붉고, 달콤했던 우주가 엄마의 손에서 다시 태어나던
일종의, 창조의 순간.
끝이 없을것 같던 나선이 또아리를 틀고 결국 달달한 향을 내며 허연 접시에 툭 내려앉을 때마다
어쩌면 나는 작고 새콤한 우주가 내려앉는다며 수없이 깔깔거렸을지 모른다.
새하얀 상태로 완벽하게 반짝이는
사등분된 사과 한 알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어린시절의, 그 언젠가의 나로 돌아가지 않을수 없다.
그 땐 어려서 알지도 못했던 그 우주를 만나고 싶다고 어느날은 겁도 없이 큰 식칼을 꺼내들고 싱크대 앞에서 일을 벌였다.
하얀 접시를 꺼내고 사과를 깨끗하게 씻어 예쁘게 올려놓을 참이었고 과도를 찾다 결국 과해진 열정은 싱크대 밑 서랍을 열어 그 큰 칼을 꺼내게 만들었다.
손이 너무 작았을까,
창조주가 될 욕심의 반도 채우지 못한채
꺼낸 식칼은 미끄럽고 작던 손 아래로 새어나가
중력의 힘을 정확하게 받은 후 내 엄지 발톱의 가생이를 찍어눌렀다.
나선형 파형도, 아름답던 하얀빛도 아닌
온통 붉은 빛이라
그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었다.
세계가 빨갛게 흩어졌다.
우주는 저 멀리에도 있지 않았다며 아슬하게 깨진 발톱을 부여잡고 울고 있는데
그때 수퍼 장꺼리를 들고 바스락 비닐 소리 내며 현관문을 여시던 엄마가 달려오셨다.
몇분이었을지도 기억나지 않는 현실같던 꿈은 그렇게 끝이 났었다.
그날의 기억은 새파랗고, 새빨간 기억으로 남아 있고
머리가 큰 이후에도 웬일인지, 그날의 저주인양 하얗고 예쁜 사과 대신
서툰 갈변의 사과를 수줍게 사등분하고는
씨익 웃는게 전부였던 나의 20대.
며칠전, 엄마가 농장에서 따왔다던 단단하고 맛있는 사과 몇 알을 주시기에
냉장고 신선실에 넣어 두었다가, 하나 둘 깎아 먹기 시작했다.
오늘은 먹은 사과 껍데기를 정리하다가 문득 이제 더이상 갈변한 사과를 먹지 않아도 된다는걸 깨달았다.
길게, 예쁘게 잘린 사과의 나선형이
접시 위에 원래 얹었던 모양인양 놓여 있었다.
언젠가, 지금은 아직 내가 이름도 모르는 그 아이가
내 손을 우주처럼 보고 있는 광경을 상상한다.
하얀 손으로, 완벽한 나선형을 만들어
정확한 리듬으로 사등분해
아이의 접시에 놓아줄 수 있는 날이 와줄까.
역시 그날처럼 조금은 부끄럽고 과한 욕심 같아 웃게 된다.
그래서,
오늘은 나선형 기념일.
붉은 껍질을 뒤집어보니
노오랗게 갈변된 색들이 현기증나게 달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