왔다, 번아웃이.
살다 보면 가끔 운명에 맡기면 편안한 일들이 도처에 있었다. 비뚤어질 것 같은 일에 ‘될 대로 돼버려라’ 하는 마음가짐 같은 것.
고민을 이야기하는 친구나 동료에게도, 실수를 많이 해 보는 것이 경험이라는 말을 늘 달고 살았다.
처음 해보는 것들에는 특히, 실수가 중요하고 그 실수들이 모여 정말 나의 것, 이 되는 것이라고.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게 하고 싶은 말을 남에게 하는 것이 위로였던 것 같다. 그 위로를 하면서 나 스스로도 치유된다고 믿고 있었다. 보람도 느꼈다. 그래서인지 스스로를 괜찮다고 속이기도 쉬웠다. 그렇게 정작 나 스스로는 돌보지 못하는 딜레마에, 봄과 여름을 맡겨두고 나는 괜찮아 , 로 가을을 버텨보려던. 참이었다.
이 정도는 다들 버티며 다니는 거야. 하고.
진급 이후 내 생활의 절반은 모든 것이 업무였다.
업무의 강도가 높아 끝나면 집에 와서 쓰러지기 일쑤였고 새로 알아야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아 과도한 인풋을 받아들이다 보니 몸이며 정신이며 이미 많이 다쳤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주 단위 스케줄, 생활의 루틴을 지킬 수 없는 근무시간, 부족한 수면. 유난히 까다로운 손님들, 관계와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크랙 같은 것들이 무기력으로 일상을 잠식하고 있었다. 숨이 찼는데, 이 정도는 괜찮다. 괜찮다. 하고. 결국 내가 나를 벼랑에 내 몬 셈이었다. 나는 그것이 못내 절망적이었다. 누구보다도 나에 대해서는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는 나를 돌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열정적으로 쏟아붓고 소모하는 동안 나는 나를 지켜내지 못하고 무너뜨리고 있었으니까.
가장 먼저 몸에 통증이 찾아왔다. 그리고는 호흡기 통증이 심해졌다. 온몸에 염증이 돋아 항생제를 먹기 시작했다. 3월부터 섭취하던 신경안정제의 양은 늘었고, 식욕이 없으니 자연스레 체중이 줄었다. 근무를 하기 전에는 가벼운 심계항진부터 시작해서, 호흡이 어려운 증상이 잇따라 이어졌다. 업무를 위해 메모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으면 기억할 수 없었다. 리스트업을 해 둔 업무를 체크해가며 오늘은 무사한지를 점검하고, 그래도 이 정도면 해냈다. 싶을 때는 보람도 느꼈다. 괜찮은 줄 알았다. 그러다가 점점 기억력이 흐려졌다. 적어둔 것을 기억하지 못할 때가 와서야 나는 두려워졌다. 먹으려고 식탁에 얹은 약봉지를 쓰레기통에 버려두고 잊어버리고, 꼼꼼히 읽고 갔던 공지를 기억 못 해서 무언가를 깜빡하거나 하는 잦은 실수들이 이어졌다. 나는 이런 변화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내 탓이 아니었다. 그런데 내 탓이었다. 그 시기가 올 때까지 내가 괜찮다고 착각해버렸던.
바로 내 탓.
병원에서는 그것을 인풋 과다.라고 불렀다. 집중력에 좋은 약을 한 알 더 처방받아먹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사정으로, 또는 주변의 환경으로, 너무 많은 것을 받아들이고 익히는 동안 마음에 덧댈 보호복 하나 착용하지 못했다니, 억울하고 무력해서 가끔 소리도 없아 울곤 했다. 진급 이후엔 그냥 신입이라더니. 난 그걸 알고 와서도 이렇게. 내가 싫었고, 사람이 싫었다.
가끔 손님을 응대할 때는 과호흡이 왔다. 마감을 하고 자전거로 집에 돌아가는 길엔 무엇을 위해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만이 뇌 속을 간지럽혔다. 사람. 사람. 사람. 지긋지긋했다.
내 의지대로 무언가를 할 수 없겠다는 불안감이 드러나게 될 즈음이야 결국. 나는 병가를 결심했다.
, 될 대로 돼라.
먼저 오는 버스를 그냥 타거나, 플레이리스트에 셔플을 걸어두고 드물게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흥얼거린다거나, 비행기 티켓을 덜컥 결제해버린다거나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다음의 일을 가볍게 걱정할 수 있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 줄 사실은 몰랐다.
무언가를 운명에 맡기는 일은, 내게 여유가 있어야만 가능했다고 새삼 고통의 끝에 발을 내려놓고서야 깨닫는다.
여유,
스스로를 돌볼만한 여유가 전혀 없었으니 그동안 많이 아프고 괴로웠구나. 싶더라.
시간 안에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뛰다가 숨이 찬 상태로 집에 오면 치울 것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아, 그럴 때의 무력감이란.
11월.
이제 한 달 동안은, 결정을 머뭇거리거나 선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보기로 한다.
한동안 건드리지 않던 주방을 조금 사용해볼까 한다.
입욕제를 살까 싶다. 인생에서 쓸데없어 보아는 것도 다시 바라봐보려 한다,
필요 없는 것을 버려보려 한다. 또 주변에 나를 감싸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굉장한 것들인지 천천히. 살펴보려 한다.
사 두고 읽지 않은 책. 선물 받은 문장들을 그러쥐어 볼까 한다. 부러 카메라를 챙길까 싶다. 어깨에 닿는 그 무게를 기꺼이 감당할 여유가 내게는 허락될 테니까.
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보통 무력해서 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장바구니에 평소 사지 않았던 식료품들을 넣으며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마
다,
날씨 같은 것들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