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마도 Nov 26. 2022

가을의 유후인, 하루 걷기.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올해 11월은 유난히 남쪽을 많이 기웃거렸다. 어렵게 얻은 한 달의 휴일. 내려놓고 가든, 얹고 가든 어느 쪽으로든 계속해서 걸으려면 신발끈을 다시 묶을 시간과 기운이 필요했다. 사실 나는 거기에 필요한 기운까지 전부 소진한 여름을 잘 접어 보내지도 못한 채, 가을을 맞았다.


봄은 알면서도 가더니 여름은 지독히도 안 갔다. 기억할 것이 많았고 잊을 것도 많았다. 해야 할 것들이 줄줄이 순번대로 서 있었고, 그걸 매 끼 챙겨 먹어야'만 하는' 기세로 처리하면서 남지 않아도 될 생채기들을 모른 새 늘리곤 했다. 내가 하는 일은 유난히 손이나 몸에 보이지 않게 상처가 남는 일이다. 어딘가 든 멍을 모르는 채 움직이다가 약하게 긁힌 자상을 모르는 체하다가 어느 순간 자각하는 날이면 시큰거리고 아프곤 했다. 누구도 아프라고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아팠다. 혼자 걸을 시간과, 혼자 무엇인가 할 시간이 필요했다. 고르고 선택하는 데 특별히 선택지가 없었던 나날들에서 잠시 맨발이 되었다. 11월. 바깥으로 걸어 나오니 발이 조금 시렸다.


다녀와야지, 생각을 했다. 남쪽을 선택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조금 덜 쌀쌀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굳이 남쪽을 찾은 건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찾은 남쪽은 맨 손으로 카메라를 들고 다녀도 괜찮은 계절이었다. 후쿠오카행 비행기 티켓을 끊고, 혼자 여행을 준비하는 동안 유후인행 열차도 함께 예매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히가에리(당일치기)여도 괜찮을 터였다. 유후인은 그렇게 둘러보기 좋은 곳이니까. 


유후인노모리, 유후인행 열차를 타는 날 아침엔 목 상태가 조금 안 좋았다. 분명 처음 묵는 숙소에서도 입을 헤- 벌리고 잤을 것이 분명했다. 건조한 상태로 물 한 잔 못 마시고 예매한 티켓을 찾으러 창구를 찾았다. '유후인노모리노치켓또, 고코데 우케토레마스?'(유후인노모리의 티켓, 여기서 수령할 수 있나요?' 하고 물었을 때 당연한 듯 고개를 끄덕인 역무원 아저씨 덕에 20분을 jr창구에 버리고 나니, 내게 남은 건 고작 7분이었다. 미도리노구치라고, 분명 알고 있었는데, 바보짓을 해버렸네. 열차 외관도 찍지 못하고 기차에 겨우 올랐을 때 엎친데 덮친 격으로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아.


출발한 기차에서 도시락을 사 먹을 수 있다는 걸 좌석에 앉아서 한 숨 돌리고서야 안 나는 그제야 조금 안심했다. 도착할 때까지 빈 속일 수는 없었다. 매점이 곧 영업을 시작한다는 안내방송에 기대어 목마름을 조금 참기로 했다. 옆자리엔 여행을 떠나는 중년 부부 중 여자분이 좌석을 따로 예매하셨는지 건너편 남자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시는 듯했다. 자리를 바꾸어 드릴까, 말을 걸어볼까 생각하다가 쓸데없는 오지랖 같아 그만두었다.


9시 25분이 되었다. 2호차에 있는 매점이 오픈한다는 시간. 스이마센, 하고 나는 자리를 비웠다. 2호 칸으로 가니 1 호칸 끝까지 줄을 늘어선 손님들이 보였다. 식은땀이 찔끔 났다. 도시락을 먹어야 하는데. 우선 그래야 하는데, 한정된 수량이 다 팔리면 얄짤도 없을 터였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마지막 도시락 하나를 내가 샀다는 걸 알았을 때 아무도 모르는 환호성을 질렀다. 우선 속으로. 페트병에 든 차가운 센차를 사고 싶었는데, 따뜻한 그린티를 주문해버린 정도의 실수는 도시락을 얻은 즐거움에 비하면 별 것 아니었다. 




절임류가 다양하게 든 도시락, 적당하게 간이 밴 것들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고 있자니, 옆 자리 아주머니가 '잠깐, 괜찮을까?' 하고 말을 거셨다. 도시락이 너무 맛있어 보여서 하고 웃으시기에 제가 마지막 것을 사서 기분이 매우 좋은 상태라고, 쓸데없는 tmi를 중얼거리고 말았다. 아주머니는 잠시 유쾌하게 웃으시더니 혼자 여행을 온 것이냐 물으셨고, 나는 유후인은 6년 만에 오랜만에 온다, 답을 했다. 그랬더니 그분은 처음이시라고. 히가에리(당일치기)? 하고 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이 열차의 목적지까지 처음 가신다고, 어떻게 하루를 보낼지 고민이시라고 해서 온천 당일치기를 생각해보시는 건 어떻냐고 추천을 드렸다. 온천도 히가에리가 가능한지 몰랐다며 놀라시는 아주머니에게 나는 즐거운 여행 되시라며 웃어 보였다. 


그날의 날씨는 흐림. 처음 방문 때는 택시를 타고 갔던 그곳을, 이번엔 걸어서 가 보기로 했다. 1.3km. 30분 정도는 걸릴 터였지만, 마을의 풍경을 보며 걷기엔 그만이라는 생각에 구글 지도를 켰다. 복잡하지 않은 길을 걷다가 메인 상점가에서 벗어난 마을의 풍경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택시의 기본요금을 내는 정도의 거리. 듣던 음악의 볼륨을 조금 줄였다. 생각해보니 이런 감각을 좋아하곤 했다. 조금 혼잡한 길에서 조용한 공간으로 접어들 때, 듣던 음악이 크게 느껴져 이어폰 한쪽을 빼게 되는 감각.




6년인가, 못 오던 새 늘어난 점포도, 사라진 점포도 있었지만 조용하고 아늑한 느낌이 드는 곳이라는 건 특별히 변하지 않았다. 후드티 한 장을 되는 대로 걸쳐 입고 걸어도 흐린 날의 바람이 다 날카롭지 않아 나는 종종 멈추어 서서 풍경을 눈에 담았다. 조용한 집들 앞을 지나칠 때에는 이름도 모르는 작은 꽃들의 이름을 상상했고 휴무라는 간판이 걸린 식당 앞에서는 그 식당에서 영업 중엔 어떤 음식 냄새가 날지 생각해봤다. 안개가 낀 마을을 오르며 숨이 조금 가벼워졌다. 마침 캔커피가 다 식을 때쯤, 무소엔에 도착했다. 



몽상원. 무소엔에서는 어떤 몽상도 허락될까? 택시를 타고 도착했을 때는 몰랐던 무소엔의 이름을 6년 만에 알았다. 입장권을 끊기 전 아직 다 가지 않은 가을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입욕을 하면서 바라볼 유후다케를 상상하면서. 



매표소에 있는 직원 분이, 앞쪽에 온 한국 가족 한 팀에게 당일치기 온천에 대해 유창한 한국 발음으로 설명하시는 걸 가만히 듣고 있었다. 숙박부 대신 간단한 명부를 받는데, 영어로 적어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어디에서 왔냐고 물으셔서 '한국어를 너무 유창하게 잘하셔서 놀랐어요.' 하고 한국어로 대답했더니, '일본에 살았던 적 있어요? 공부되라고 나머지 설명은 일본어로 해야겠다.' 하는 한국어가 돌아와서 잠시 웃었다. 이런 기억들이 결국은 추억으로 남게 되는 것이 좋다. 




열두 시에 입장해서, 한시 반까지 느긋하게 입욕을 하는 동안 질리도록 본 가을 색. 10분 입욕했다가 나와서 가만 유후다케를 보다가, 다시 또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큰 노천탕 하나뿐인 당일치기 온천이 사실 뭐 그렇게 대단한 게 있겠냐만 가지에서 떨어져 물 위에 가벼이 뜨는 가을 잎, 동백 잎을 주워다 모으는 여자아이를 보면서 참 여러 가지 마음이 들어 차분해졌다.


중력을 이기지 못하는 것들, 중력대로 떨어지는 것들, 가벼이 물에 뜨는 것들. 흘러가거나 가라앉는 것들. 자력으로 흘러가지 못하는 것들이 자연히 그리 되는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힘을 빼야만 뜰 수 있겠구나, 저렇게 흘러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무력히 들었다. 무력하다기보다는 확고하게 가볍고 단순한 생각이었다.  

흘러가려면 흘러가야겠구나, 응당 생각지 않아도 흘러간다. 계절이 말도 없이 지나가듯 그렇게. 얼마나 많은 힘을 주고 있었나, 생각하니 새삼스레 돌아가신 아빠 생각이 났다. 나 좀 가벼워져도 괜찮을까, 하고 대답해 줄 사람도 없는 허공에 물으니 눈앞에 보이는 동백이 고개를 끄덕이듯 흔들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망상하는 시간 몽상하는 시간. 다른 언어들이 여러 결로 섞여 들려오는 그곳에서 나는 한 시간 반 동안 가만히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편안해졌다. 이내 자연스레 눈물이 났다. 아, 올해 정말 지긋지긋하다. 얼른 지나가 버려라. 

유난히 눈앞 단풍이, 붉었다. 






돌아가면 다시 추울까, 겨울처럼 느껴질까 북쪽은. 남쪽의 작은 마을을 오후 느즈막까지 걸어 다니며 나는 마지막 가을을 여기서 맞는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천천히 걸었고, 생각했고, 오후 내내 임의 재생되는 오래된 아이팟을 귀에 걸고 다녔다. 예전 음악들을 뱉어내는 유선 이어폰에서 흐르는 예전의 음악들이, 기억들이 지금의 나를 되려 증명하고 있었다. 


6년 만의 유후인은 그렇게 다 괜찮은 채로 있었다. 

또 그렇게 나도 어쩌면,

괜찮지 않은 채로 괜찮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날씨 같은 거야, 하고 중얼거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