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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매오 Feb 07. 2021

삼총사는 없다

외로워지든지, 외롭게 만들든지

나는 고독한 유딩이었다. 어쩐지 친구들이 좀 시시하게 느껴졌다. 아마 빠른 년생을 향한 갖은 구박과 핍박에 시달리며 내린 결론이었을 것이다. 똑같이 여서 일곱 살에 불과한 애들이 시도 때도 없이 형, 누나라고 부르라며 약을 올리니 열이 받아, 안 받아? 아, 진짜 유치하게 왜 저래. 물론 유딩이 유치한 걸 이상하게 여길 이유는 없다. 그래도 그때의 나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거의 확실할 것이다) 유치원에 친구가 별로 없었다. 파랑반 선생님이 제일 친한 친구였다.


그나마 어울렸던 친구가 둘 있다. 걔들과는 주로 ‘지구용사 벡터맨’ 놀이를 했다. 유치원 뒷마당에서 우리는 영웅처럼 활약했다. 난 ‘벡터맨 베어’를 맡았다. 사실 난 베어를 별로 안 좋아했다. 변신 전 베어의 꼬불머리가 되게 별로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세 번째로 소개된다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대장이나 다름없는 ‘벡터맨 타이거’나 2인자 특유의 멋짐이 폭발하는 ‘벡터맨 이글’을 좋아했지만, 그건 다른 둘의 역할이었다. 은근히 짜증났다. 어린이에게 삼총사 중 3번이란 화룡점정보단 쫄병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십 년쯤 지나 중딩이 됐지만 나는 더 이상 고독하지 않았다. 뚱뚱해서 뚱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지만 딱히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것쯤 ‘캬캬캬’ 하고 웃어 넘길 줄 아는 아이로 자랐다.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가 스펀지밥 ‘뚱이’인 이유도 그 별명 때문이다. 어쨌든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이 교실, 저 교실 쏘다니며 다른 반 친구들과도 사이좋게 지냈다. 보지 않아도 안다. 생활기록부엔 이렇게 쓰여 있을 것이다. “교우관계가 원만함.” 내 사춘기는 어쩌면 유딩 때 왔다 간 게 아닐까 싶다.


그러던 어느 날 시험 공부를 하러 갔던 시립 도서관에서 우연히 타이거와 이글을 만났다. 우리는 유치원을 졸업하며 각기 다른 초등학교로 진학했고 당연히 연락이 끊어졌다. 그런데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타이거와 이글은 같은 중학교에 배정 받았다. 6년 만에 다시 만난 이들은 함께 시험 공부를 (핑계로 밤 늦게까지 놀러) 다닐 정도로 친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걔들은 반가워하며 내 핸드폰 번호를 받아갔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15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서로 연락을 주고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가끔 상상한다. 나도 타이거와 이글이 다녔던 중학교에 배정 받았다면 유년기의 우정을 다시 이어갈 수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그 관계에서 내가 얻어갈 수 있었을 만한 것들을 하나씩 떠올려봤다. 즐거움, 위로, 공감, 의지 같은 것들. 그런데 꼭 마지막에는 찝찝한 기분이 남았다. 나도 타이거나 이글 역할을 맡고 싶었지만 삼총사가 되려면 베어 역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 그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아쉬웠다. 나와 나머지 둘 사이의 은근한 거리감도. 그 관계는 오히려 아득한 유년기에만 머물러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셋은 좀 불안하다. 혼자는 확실히 외롭고 둘은 그보다 좀 덜 외롭지만 셋은 경우의 수를 갖기 때문이다. 온전히 셋으로 존재하거나, 셋 중 둘에 속하거나, 셋 중 하나에 속하거나. 온전한 셋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니까 패스. 먼저 셋 중 하나일 때를 보자. 이때는 확실히 외롭다. 혼자서 하나일 때보다 더 외롭다. 왜냐면 인간은 보통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 때문에 괴로워지니까. '희망고문'이라는 단어가 그 모순성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널리 쓰이는 이유가 있지. 셋 중 하나의 입장에서 나머지 둘을 볼 때 느껴지는 무력함을 아는지?


셋 중 둘이 마냥 편하단 건 아니다. 그냥 둘이면 몰라도 셋 중 둘이 되면 나머지 하나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신경 쓰지 않는 순간 그냥 둘이 된다). 비슷한 맥락으로 나는 해리포터와 헤르미온느와 론의 관계를 온전한 셋으로 보는 시각에 조심스레 반론을 제기한다. 셋 중 둘이 부부인데,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관계의 기울기에 따라 해리가 난처해질 수도 있고(누구 편을 들지?), 외로워질 수도 있다(그래도 지니가 있으니까). 자, 이제 당신도 ‘이러나 저러나 인간관계에 있어 셋이란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 숫자’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글: 아매오 @a.maeo

그림: 말코 @malco.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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