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으로 보는 삶과 계획
치킨을 먹을 때면 두뇌가 풀가동된다. 어느 부위를 먹고, 어느 부위를 남길지 고민하느라 바쁘다. 1인 1닭이 안 되는 1인 가구라면 피할 수 없는 선택. 고려해야 할 변수는 두 가지다. 부위별 고유의 맛과 상태에 따른 맛. 예를 들면 나는 목과 다리를 좋아한다. 방금 튀겨 따뜻하고 부드러운 상태는 물론 완전히 식은 뒤 대충 데워 놓은 상태라도 꽤 맛있게 먹는다. 하지만 퍽퍽살은 남길 경우 대부분 버린다. 고민은 여기서 시작된다. 치킨 한 마리를 두 끼에 걸쳐 온전히 즐기기 위해 좋아하는 부위를 남겨야 할까? 퍽퍽살을 버리고 한 끼만 먹더라도 최상의 부위를 최상의 상태로 먹어야 할까?
순살을 시키면 고민할 필요가 없지 않냐고? 맞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순살을 잘 먹지 않는다. 일정한 수준의 맛을 식사 내내 일관적으로 경험할 수 있지만 어쩐지 그건 안정적이라는 느낌보다 밋밋함으로 다가온다. 부위마다 제각각인 뼈 치킨이 굽이치고 휘감기는 강이라면 순살 치킨은 직강 공사로 쭉 뻗은 형태를 갖춘 강이라고 할까. 거기엔 어떤 기승전결이나 희로애락도 없다. 그저 먹는 경험을 매끈하게 통과해낼 뿐이다. 좀 더 의미부여 해볼까. 순탄하게 흐르는 삶보다는 기쁨과 슬픔, 사랑과 이별이 반복되는 삶이 더 재밌을 것 같다는 마음이 나로 하여금 순살 치킨이 아닌 뼈 치킨을 고르게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린 항상 현재와 미래를 저울질한다. 크고 작은 선택들이 가져올 결과를 가늠하며 삶을 ‘계획’한다. 하지만 이제껏 경험한 바에 의하면 계획을 세우는 속도보다 그것이 무너지는 속도가 언제나 더 빨랐다.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는 계획을 세워 모든 계획이 물거품 되는 상황만큼은 막아보자는 자조적 농담도 수시로 던졌다. 20대의 미숙한 경험과 통찰에서 비롯되는 계획은 대부분 이뤄질 수 없기에 완벽하게 쓰레기라는 문장을 읽은 적 있는데, 내 생각엔 이 또한 미숙한 통찰이다. 왜냐면 우리 엄마만 하더라도 쉰이 될 때까지 이뤄지지 않을 계획 세우기를 반복했다고 하셨으니까.
존 레논이 그랬다지. 삶이란 다른 계획을 세우는 동안에 일어난다고. 이런 이야기를 사랑한다.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 누구보다 계획적으로 살았던 사람만이 내놓을 수 있는 통찰. 존 레논조차 자기 뜻대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은 나의 여러 계획이 무너지는 상황에 한줄기 위로가 된다. 잊지 말아야 한다. 계획은 삶의 일부여야 한다는 사실을. 삶이 계획에 빨려 들어가면 곤란하다. 그러니까 치킨 먹을 때 고민 좀 줄여야지. 맛있는 부위는 오늘 먹어야지. 맛없는 부위는 볶음밥으로 먹든 어떻게 맛있게 먹는 방법을 찾아봐야지. 조금만 덜 게을러지는 것으로 계획 저편의 삶을 채워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