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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매오 Dec 25. 2021

나만의 성과지표

매일매일 메일을 쓴다

매일매일 메일을 쓴다. 섭외나 제안이 잦은 업무 특성상 콜드 메일이 대다수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답장을 준다. 사회가 마냥 차갑기만 한 건 아니더라. 물론 거의 다 거절이긴 하다. 역시 사회는 단호해. 간혹 더 자세한 내용을 듣고 싶다는 답장이 온다. 갑자기 막 긴장된다. 쐐기를 박으려면 첫 메일보다 구체적인 설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괜찮다. 일단 대화를 텄으니 공유하는 맥락이 생겼다. 최소한의 디딤돌이 생긴 것이다.


드물게 답장조차 못 받기도 한다. 그때부터 난 온갖 불안과 자조의 화신이 된다. 답장할 가치도 못 느낄 만큼 성의가 없었나? 내용을 쉽게 풀지 않아서 읽다 꺼버렸나? 메신저부터 별로라서 메시지까지 가지도 않았나? 등등등. 일에 대한 평가와 인간에 대한 평가는 별개로 받아들이라고 하던데, 아무래도 그게 안 되는 인간인가 보다. 답장을 주지 않은 사람이 원망스럽... 원망할 시간도 없다. 나 스스로를 공격하는 감정들이 턱끝까지 밀어닥쳤으니까.


메일은 단 한 명의 독자를 상정한 글이다. 읽기와 쓰기를 유일한 취미이자 역량으로 여기는 나는, 그걸로 단 한 명의 리액션도 못 끌어낸 사실에 대한 원망을 나에게 보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런 상황이 부끄럽지 않다면 일찌감치 다른 길 찾아봐야지. 메일 하나 설득력 있게 못 쓰는 에디터와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메일을 받는 사람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그 메일이 나의 포트폴리오라는 것을 늘 생각한다.


일하며 주고받은 메일들을 종종 뜯어봤다. 제목은 어떻게 쓰는지, 인사는 어떻게 하며 상대방을 어떻게 부르는지, 스몰토크는 어느 정도 포함하면 좋을지, 문단은 어디서 나눌지, 어떤 순서로 내용을 전달할지, 마무리 인사는 뭐라고 할지, 심지어 본문 마지막에 고정으로 덧붙이는 ‘감사합니다.’와 ‘OOO 드림.’ 사이 한 줄을 비울지 말지까지 살폈다. 포트폴리오를 조금씩 고쳐가는 것처럼 새로운 메일을 보낼 때마다 여러 요소를 넣거나 뺐다.


어느 날 모 브랜드 홍보담당자와 점심을 먹었다.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쭉 메일만 주고받은 사이다. 메일 쓰기에 있어서는 사수처럼 여기고 참고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의제가 없는 단순 만남이었기 때문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회사 일 말고도 뭘 하긴 해야 할 거 같은데 뭐하죠? 웹소설을 써볼까요? 그러다가 경력 얘기가 나왔다. 쭈뼛쭈뼛 ‘이제 좀 있으면 만 1년이 된다’고 털어놨다. 그가 다소 의외라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엥? OO님을 잘 모르지만 메일 쓰는 거 봤을 때는 그래도 3년 차는 된 줄 알았어요.”


...... 빈말이겠지. 안다. 나도 알아. 립서비스라는 거. 하지만 거기엔 일말의 진심이 포함됐으리라 소심하게 믿어본다...... 음, 역시 아닌가. 이렇게 하자. 그건 적어도 당시 내게 가장 필요한 말이었다. 불안에 흔들리는 나를 긍정하기 위해 필요한 적정량의 칭찬. 실제로 그의 말 한마디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좋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내가 아주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건 아니구나’라고 여길 수 있는 작은 근거를 마련해줬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 내게 메일은 포트폴리오와 같았다. 일종의 바로미터. 내가 ‘내 일’에 얼마나 욕심을 갖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이는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영역. 근데 어디 메일만 그럴까. 모두 저마다의 성과지표 하나씩은 갖고 있기 마련이다. 일하면서 특히 신경 쓰는 것, 그걸 달성하기 위한 노력. 남들에겐 아무것도 아닌 듯 보여도 자신에겐 어떤 지속가능성을 부여해주는 것. 그런 것들이 모여 개인의 성장을 이룬다고 믿는다.


개인의 성장은 크게 둘로 나뉜다. 역량적인 성장과 심리적인 성장. 그리고 이것들은 제각기 둘로 나뉜다. 역량적인 성장은 '할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게 되는 것'과 '할 수 있었던 것을 더 잘할 수 있게 되는 것'으로, 심리적인 성장은 '작은 성공에 들뜨지 않게 되는 것'과 '큰 실패에 좌절하지 않게 되는 것'으로. 나만의 성과지표를 두는 것의 장점은 이러한 성장들을 작지만 아주 구체적인 형태로 자주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202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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