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계속 이어지니까
가고 싶었던 회사의 최종 면접만 두 번을 봤다. 모두 불합격했다. 다른 회사의 채용 과정에서도 번번이 최종 면접에서 미끄러지곤 했다. 더이상 그 길을 고집하기 어려워졌다. 마침 취업 준비의 데드라인으로 삼았던 2년이 된 시점이었다. 함께하던 스터디원들에게 마지막으로 인사하러 간 날 A와 나눈 대화가 유독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래서 이제 뭐할 거예요?”
“모르겠어요. 일단 놀려고요. 연말이기도 하고.”
“아니, 뭘 몰라요. 계획 없어요?”
“없어요. 일단 놀고 생각해보려고요.”
“아니, 진짜 없다고요?”
“네. 진짜 없어요”
“진짜요?”
“진짜요.”
A는 다소 시니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자신을 닮은 날카로운 글을 쓰는 사람. 빈틈이 보이지 않아 왠지 모르게 긴장감을 주는 인간. 당황과 황당 사이의 감정을 그대로 내비치는 A의 표정은 그래서 더 흥미로웠다. 나는 언젠가 그가 나지막이 흘렸던 말을 떠올렸다.
“시험이라는 게, 취업 준비라는 게, 결국 자존감 깎아 먹으면서 버티는 싸움인데, 나도 참 자존감 높은 사람인데, 그런데도 이게 쉽지가 않네요.”
나도 실은 더 깎아 먹을 자존감이 남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면 다른 이들의 사기마저 꺾을까 두려웠다. 깨져 나간 멘탈 조각이 그들이 그리는 미래로 파고들면 안 되는 일이었다. 적어도 그 자리에는 최대한 긍정적인 뒷모습을 남기려고 애썼다. 후회도 미련도 걱정도 없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헤어졌다. 실제로 후회는 없었다. 하지만 미련과 걱정은 지금도 그 흔적이 보일 만큼 컸다.
무언가를 준비하는 삶은 유예된 삶일까. 그 무언가가 끝내 실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잃어버린 삶이 아닌가. 거기에선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이런 물음들을 붙잡고 책 『GV 빌런 고태경』을 읽었다. “실패한 사람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또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손에 잡힐 듯하다 멀어지고 반복하다 보면 결국 우리의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게 돼.” 같은 문장들이 내 마음속에 남은 과거의 흔적을 타고 빠르게 미끄러져 들어왔다.
불합격한 회사의 채용과정과 전반적인 준비 과정에 대해 썼던 후기를 다시 읽었다. 신세 지던 친구 집에서 짐을 빼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썼던 글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글은 실패담입니다.”라며 시작하는 글. 똑같은 삶을 살아도 그것은 성공한 사람에게는 성공의 이유가, 실패한 사람에게는 실패한 이유가 되기 마련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문장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실패자로 여겼다. 자조했다. 그런데 고태경은 그러지 말라고 한다.
“누군가 오랫동안 무언가를 추구하면서도 이루지 못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비웃습니다. 자기 자신도 자신을 비웃거나 미워하죠. 여러분이 자기 자신에게 그런 대접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젠 나도 안다. 실패는 비웃음의 대상이 아니다. 오랫동안 추구한 뒤에 얻은 결과라면, 더더욱 그것이 접전 끝에 갈린 결과라면 성공만큼 실패에서도 많은 배움을 얻곤 한다. 겨우 한 번의 갈림길이었을 뿐이다. 너무 많은 기회와 가능성이 남았으니 내가 할 일은 단지 크고 작은 성공과 패배를 쌓아가는 것. 그러니까 무언가를 준비하는 삶은 유예된 삶도 잃어버린 삶도 아닌 자신을 단련시키는 지금 이 순간의 삶이었던 셈이다. 의미는 바로 거기 있었다.
‘가고 싶었던 회사’는 채용과정의 단계마다 문자로 공지를 전했다. 그리고 문자의 마지막 문장은 늘 “여러분의 행운을 기원합니다.”였다. 최선이나 노력이 아니라 행운을 빌다니. 아마도 그건 합격자가 아닌 불합격자를 위한 메시지였던 듯하다. 성공과 실패는 온전히 능력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니 자조하지 말라는 따뜻한 위로. 왜냐면, 성공이든 실패든 한 시절이 끝나는 자리에서 곧 새로운 시절이 시작되니까. 삶은 그렇게 계속 이어지는 거니까.
202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