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기야 디여차 어이야 디여
야자는 열 시에 끝났다. 반복되는 야자의 지겨움을 달래기 위해 라디오 프로그램 <강인, 태연의 친한 친구>(이하 친친)를 들었다. 친친이 공부에 지나치게 도움이 된 나머지 그게 끝나고 나서도 공부를 이어가는 일은 당연히 한 번도 없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라디오 듣는 게 공부에 도움이 되면 얼마나 될까. 오히려 음악을 듣는 게 나으면 나을 테다.
당시 외운 영어 단어나 수학 공식 따위는 이미 잊은 지 오래다. 반면 그때의 풍경은 아직 생생하다. 8시가 되면 MP3를 꺼내 라디오를 켜던 것, 한 번씩 들려오는 “컹컹” 하는 태연의 웃음소리에 함께 낄낄거리던 것, 클로징 멘트를 신호로 가방을 싸고 의자를 앞뒤로 끌던 것. 그 모든 것은 열일곱 평생 처음 해보는 야자의 지루함과 시험공부의 고단함을 달래준 풍경들이었다.
하지만 친친을 듣는 것은 철저히 야자 시간에 한정됐다. 도서관에 강제로 3시간 동안 몸이 묶여 있지 않았는데 굳이 찾아 들을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라디오와 가까운 인간도 아니었을뿐더러 강인이나 태연의 팬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니까 친친은 야자의 지루함과 시험공부의 고단함을 달래기 위해 투입하는 마취제, 일종의 ‘노동요’였던 셈이다.
분리해서 살펴보자. 노동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긴요함을 갖지만, 노래는 문화적인 것으로서 노동에 비해 부수적인 성격을 띤다. 노동에는 생존을 위한 몸놀림이 있지만, 노래에는 취향을 위한 선택이 있다. 그렇다면 노동요는 어떤가? 둘을 합쳐 놓았으니 언뜻 중간적 성격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 노동요는 노동 쪽에 치우쳐 있다.
노동요는 개인의 취향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단지 육체적 고됨을 덜어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노동요의 정서는 육체가 놓인 현장적 상황이 주도한다. 라디오를 즐겨 듣지도 않았고 강인과 태연의 팬도 아니었던 내가 매일 친친을 들었던 건, 모두 ‘야자의 지루함과 시험공부의 고단함으로 가득한 3시간’이라는 현장적 상황이 낳은 결과였던 셈이다.
노동요는 기본적으로 능률을 높이는 데 목적이 있지만 그 역학구도는 더하기(+)보다 빼기(-)에 기반을 둔다. 쉽게 말해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을 더해주는 게 아니라, 일을 하기 싫은 마음을 덜어준다. 정말로 집중하는 순간에는 라디오든 노래든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러니 노동요의 역할은 딱 그 정도다. 일하는 시간을 단지 견디며 흘리는 시간으로 남겨두지 않는 것.
그래서 노동요는 취향에 살짝 어긋나는 게 좋다. 평소 취향대로 고르면 나도 모르게 흥얼거릴 수 있으니까. 집중력이 흩어지고 일의 효율은 떨어진다. 노동요의 본래 목적에 어긋난다. 노동요는 들리지 않기 위해 존재함을 잊지 말자. 성공한 노동요는 들리지 않는 노동요뿐이다. 생각해보면 고3이 되고 친친을 멀리한 이유도 어느새 DJ탱구에게 친밀감을 느끼기 시작해서였다.
물론 아무리 훌륭한 노동요라도 획기적으로 능률을 높여주진 않을 것이다. 엠씨스퀘어도 아니고 말이야. 당연히 중요한 건 노동자 본인의 역량이나 태도일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신중하게 유튜브 노동요 플레이리스트를 고르는 걸로 하루를 시작한다. 고딩이었던 내가 지루한 야자를 빼먹지 않고 고단한 시험공부를 해 나갔던 데는 그래도 분명 친친의 기여가 있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2020.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