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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우 Feb 03. 2022

나는 OOO이다

최근의 여행은 제주도였다. 내겐 여행 갈 때 책을 딱 한 권만 들고 가는 버릇이 있다. 혹시나 시간과 비용을 쏟아서 가는 여행이 아무 의미 없이 끝나는 게 걱정돼서, 책이 담고 있는 의미가 여행의 의미가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챙긴다. 의미의 보험이랄까. 책은 공들여 선정하지 않고 서가에서 아무 책이나 뽑아서 간다. 좀 미신적인 면모도 있지만 의미 부여란 결국엔 다 그런 거 아닌가. 제주행 비행기 티켓을 얻은 책은 『정확한 사랑의 실험(신형철)』이다. 표지가 노란색 꽃이 가득 피어있는 들판 같길래 골랐다. 제주도 하면 유채꽃이니까. 저자는 책머리에 이런 문장을 써뒀다.

<나는 해석자다. 해석자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토록 근거가 탄탄한 자기소개라니. 책에 실린 모든 평론들이 모두 책머리에 실린 문장의 근거가 된다. 이 견고함은 나를 매료시켰다. 자신의 직업을 설명할 수 있는 포트폴리오가 풍부한 사람을 부르는 말은 아마 '프로'일 것이다. 풍부한 포트폴리오에 덧붙여 <나는 OOO이다. OOO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면 그는 '프로' 이상의 무언가이지 않을까.


저 문장을 읽고 확실해졌다. ‘OOO'을 찾는 것이야말로 나의 오랜 욕망이었음을. 대학 졸업 후 나는 눌러앉을 직장을 찾는 대신 'OOO'을 찾아 헤매왔다. 비행기 차창 밖으로 구름을 봤다. 만약에 지금 비행기가 추락한다면 찾아 그 모든 헤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갈 것이다. 공기업에서 일할 땐 성과라는 말이 왠지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느껴져서, 그게 참 못 견디게 싫었다. 마케터로 일할 땐 나쁜 점도 보이는데 좋은 점만 말하는 게 피곤해서 싫었고. 지금은? 청소, 배달, 택배 '플랫폼 노동 3신기'와 가뭄에 콩 나듯이 들어오는 일거리를 받아 풀칠이야 하고 있지만 다 싫은 건 매한가지다. 이 생활에 미래가 없는 줄은 알았지만 시간은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어느 때보다 시간이 모자란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영원히 젊을 순 없는데, 아무래도 나는 아무것도 내려놓지 못해 앞으로 나갈 수 없는 바보인가 봐. 여행이나 다니고 책이나 읽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래서 지금 죽는구나. 여행 가는 길에. 책 읽다가. 비행기가. 추락해서.


비행기는 추락하지 않았다. 왜 비행기를 타면 항상 추락하는 상상을 하게 되는 걸까? 나는 추락을 상상하면 그걸 겁내기보단 그냥 체념해버린다. 그러곤 꿀잠을 잔다. 잠에서 깨면 언제나 목적지에 도착해있다. 운이 좋게도.


혼자 제주도를 여행하다 보면 낯선 사람을 만날 기회가 많다. 낮에 “저 다 정리하고 제주도 내려와서 귤이나 딸까요?”라고 물어봤다가 게스트하우스 사장님한테 크게 혼났다는 누나와 다 정리하고 제주도에 내려와서 중장비 대여하는 일을 한다는 형을 만나 맥주를 먹었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두 사람은 이만 다 정리하고 다시 자소서를 쓸까 고민하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아직 괜찮은 거 아니야? 조금만 더 해봐. 한 서른까지는.”





[사진 1] 의자에 묶여있는 나무


오늘 다시 <나는 OOO이다. OOO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를 생각한다. 사실 작년 내내 생각했다. 'OOO'을 찾고 말리라고. 그러다 새해가 밝았고, 음력 설도 지났다. 이제는 진짜 ‘쇼부’를 봐야 한다. [사진 1]은 오늘 아침에 카페에 풀칠에 실을 에세이 쓰러 가는 길에 찍은 사진이다. 의자가 나무에 묶여 있다고 보는 것이 맞겠지만, 내겐 나무가 의자에 묶여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런 상상을 했기 때문이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서, 주인공 나무가 마지막에 되는 것은 의자다. 소년에게 그늘을 내어주고 과일을 내어주고 몸뚱이를 내어주고 마지막엔 밑동마저 의자로 내어준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만큼 나무들 사이에서도 베스트셀러였다. 물론 최근에 들어서는 나무 역할의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는 후진 서사로 재평가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저 나무가 어렸을 땐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사는 것이 ‘좋은 나무의 삶’이었다. 이른바 '아낌없이 주는 나무 세대'인 사진 속 나무는 의자가 되고 싶었다.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평생을 살았다. 의자가 나무에 묶인 것이 아니라 나무가 의자에 묶여있다고는 이유는, 나무가 의자가 되겠다는 생각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나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의자다. 의자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과연 나무는 그를 알차게 털어갈 소년을 만날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가로수의 삶이란 그런 것이니까.


[사진 2] 비밀 스케치북


카페에 도착해선 『풀칠』 에세이를 쓰는 대신에 비밀 스케치북에 글과 그림을 끄적거린다. 『풀칠』도 좋아서 하는 일이긴 하지만, 이렇게 쉬는 날, 낮잠을 자는 대신 뭔가 써내야만 할 때면... 솔직히 좀 귀찮다. 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 하는 딴짓은 어째서 이리도 재미날까. 비밀 스케치북은 어느새 3권째다. 비밀 스케치북에 끄적이다 보면 종종 꽤 괜찮아 보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언젠가 만화로 그려보고 싶은 아이디어들이다. 하지만 실제로 만화로 옮기는 데 성공한 이야기는 없다. 갑자기 내가 만족할만큼 그림을 잘 그리게 될 일도 없거니와, 당장 해치워야 할 일들이 늘 있기 때문이다.


처음 낙서를 시작했을 땐 노트가 아니라 아이패드에 바로 그렸다. 아무 이야기나 적고 아무렇게나 그려서 인스타에 올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밌었다. 발행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나름 생산성이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부끄러워졌다. 이렇게 가볍다는 것이, 이렇게 흔하다는 것이, 내 얘기 안에서만 안주하고 있다는 것이. 제법 두꺼운 무지 노트를 샀다. 헌책방에선 김충원의 스케치 수업이라는 책을 샀다. 그 결과 회처럼 썰어내던 것을 이제는 요리를 배우고 숙성을 시켜놓고도 내놓지 못하게 되었다. 절차가 늘어났으니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내보내기 버튼은 아주 가끔씩만 누르게 되었다. 자주 내보내기 버튼을 누르는데 실패하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창작을 하고 있으니까 나의 ‘OOO’에 들어갈 말은 창작자인지도 모르겠다. 한번 말해볼까.


<나는 창작자다. 창작자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역시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너무 뻔뻔하게 느껴진다. 내가 하는 건 창작이라기보단 수집과 편집에 가깝다. 좀 더 정확하고 떳떳한 표현을 찾을 순 없을까. 나에 관해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생각의 사치를 누리고 있다는 점이다. 회사를 안 다니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그런 생각의 사치다. 회사를 안 다니기에 가능하다는 점에 집중하면, 생각의 사치는 백수만의 고유한 특징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의 ‘OOO’에 들어갈 말은 백수가 될 것이다. 재도전.


<나는 백수다. 백수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앞의 문장은 타당한데, 뒤의 문장은 좀 이상하게 느껴진다. ‘백수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는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처럼 동어반복적으로 들린다. 혹은 반드시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온몸을 던져 저항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진 행위예술가가 할 법한 말 같기도 하다. 무엇도 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행위예술가는 멋지긴 하지만 이것 역시 'OOO'은 아니다. 나는 꼭 무언가가 되고 싶기 때문에, 'OOO'을 찾고 있기 때문에.

[사진 3] 동네 책방


커피만 축내다 『풀칠』에 실을 에세이를 쓰는 데 결국 실패했다. 동료 아매오가 은근히 독촉한다. 요가원에서 한 시간 정도 몸과 마음을 다잡으면 글이 술술 나올 것 같다. 요가원에 가려고 자전거를 탄다. 자전거라는 교통수단의 특징은, 도착시간 예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리에 힘이 없어서, 타는 동안 날씨가 너무 좋아서(내려서 사진을 찍어야 하므로), 역풍이 불어서 등 다양한 이유로 도착시간이 달라질 수 있다. 오늘은 바람처럼 내달렸다. 요가 수업 시작까지 아직 30분이나 남았고, 시간이 뜬 김에 잠시 동네 책방에 들렀다. 출입문 옆엔 이렇게 적혀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걸음, 동네 책방 가는 길’. 그러니까 동네 책방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동네 책방이다. 동네 책방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다들 자기의 'OOO'을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조금 심통이 났다.


요가 가기 10분 전, 직장인 친구 '시바'에게 전화가 왔다. 친구가 시바인 이유는 이렇다. 3년 차 직장인이 된 친구는 핸들링(시바는 '핸들링'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굉장히 프로답다.) 하는 프로젝트가 엄청나게 많다. 손이 두 개라면 절대 그렇게 많은 사업을 핸들링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팔이 4개라면? 힌두교의 주신, 파괴와 창조의 신 시바는 팔이 4개다. 그렇게 친구는 시바가 됐다. 다른 이유도 있다. 시바가 회사 얘기를 하며 담배 피우는 모습은 하나의 상형문자 같다. 그 상형문자를 번역한다면 정확히 ‘후... 시바....’가 될 것이다. 시바는 내게 저녁을 먹자고 했다. 얘기를 들어달라고 한다. 목소리가 ‘후... 시바’가 아니라 거의 ‘개.. 시바’여서 요가하러 가야한다곤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사진 4] 유럽


시바와 전화를 끊고 통장 잔고를 확인해 봤다. 웬일로 먼저 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입금이 되어있었다. 마음이 풍족해진다. 역시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은 만고의 진리다. '시바'에게 그동안 숱하게 얻어먹은 밥과 술이 떠오른다. 인간은 모름지기 은혜를 저버려선 안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오며 가며 눈여겨 봐뒀던 레스토랑으로 '시바'를 불렀다. 그 레스토랑은 <나는 유럽이다. 유럽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듯한 곳이었다. 이태리어를 한국어로 표음해둔 메뉴판엔 검색해 보지 않으면 정체를 가늠할 수 없는 음식들(루꼴라? 포르치니?)이 그득하다. 주문과 계산은 테이블에서 하고, 빔 프로젝터는 벽에 부르고뉴의 포도밭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쏘아대고 있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면서 잠깐 영화를 봤다. 시골길을 홀로 걷고 있는 남자 아래로 자막이 깔리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고 싶었다. 10년간 방랑을 했지만, 배운 것은 전부 가볼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시바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같이 프로젝트를 하는 팀원 둘이 싸워서 사이에 낀 자기만 죽어나고 있다고 했다. 다 큰 어른들이 모인 회사에서도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서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고 울 수도 있다는 게 좀 놀라웠다. 시바에게 뭔가 도움 되는 말을 해주고 싶어서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 봤다. 나도 싸움 사이에 끼어본 적이 있다. 대학교 1학년 때 나는 친한 친구 둘이 룸메로 살고 있는 기숙사에 침낭을 갖다 두고 기생했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술 먹고 기숙사에 올라가던 중 친구 둘이 싸웠다. 그냥 말다툼을 하는 수준이 아니라 주먹다짐을 했다. 이유는 단 하나, 술을 먹어서. 나는 둘이 싸우는 동안 그만 싸우고 빨리 기숙사 현관문이나 열어달라고 짜증을 냈다. 친구 한 명이 잠시 짬을 내서 지문인식을 해 준 다음 다시 싸우러 갔다. 덕분에 그날 나는 침대에서 편히 잘 수 있었다. 다음 날, 두들겨 맞은 친구가 침낭 안에서 내게 물었다. "왜 안 말렸어? 넌 내가 묵을 방으로 보이니?" 시바도 팀원들에게 직접 한번 물어보는 게 어떨까? "왜 저한테 이러세요? 제가 가마니로 보이세요?" 아, 회사에선 이런 질문, 하면 안 되는 걸까? 나의 일천한 사회경험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야길 듣는 내내 딴 생각만 해대느라 제대로 된 조언을 주지도 못했는데, 시바는 적절할 때 만나줘서 고맙다고 한다. 적절할 때 만날 수 있는 사람. 이게 요즘 친구들 사이에서 내가 하고 있는 역할이다. 다들 회사를 다니는데 나만 회사를 안 다니니깐 다들 나를 '꺼내 먹어요'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 일주일 내내 약속이 있었던 때도 있다. 대학 다닐 때 교수님은 과제를 일주일에 하나만 내주지만 학생 입장에선 그런 교수님이 여러 명이라 매일이 과제라는 내용의 트윗을 본 적 있다. 직장인은 약속을 일주일에 하나만 잡지만 백수 입장에선 그런 직장인이 여러 명이라 매일이 약속이다. 친구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몇 안 되는 클라이언트들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내일 급한 취재 건이 있는데 혹시...?” 나는 '내일 급한 건'을 놓치는 법이 없다. '혹시는 역시'가 되어야만 다음에도 나를 찾아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의 'OOO'은 내 안에서가 아니라, 내가 타인과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은 자유로운 야망백수이자, 항시 대기 야망백수다. <나는 ‘꺼내 먹어요’다. ‘꺼내 먹어요’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다시 자전거를 탄다. 이렇게 밤에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가고 있으면 꼭 여행하고 있는 것 같다. 오늘 여행의 테마는 ‘OOO을 찾아서’였다. 참 많은 OOO 사이를 여행했다는 생각이 든다. 흔히들 여행을 하면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하던데, 정말 그런걸까?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떠도는 동안엔 'OOO'을 찾을 수 없는 쪽이 좀 더 진실에 가까운 것 같다. ‘OOO’을 찾는 제대로 된 방법론은 ‘여행’이 아니라 ‘존버’라면 나는 영 틀려버린 셈이다. 그래도 나는 여행이 참 좋다. 그래, 어쩌면 나의 'OOO'은 여행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캐리어 안에 삶을 집어넣고 쏘다닐 수 있게 될 때까지 당근에 당근을 거듭해야만 한다. 지금 당장!


그러나 사실은, 여행자를 'OOO'으로 삼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여행은 돌아갈 곳이 있기에 여행이다. 돌아갈 곳이 없는 여행은 이내 방랑이 된다. 여행의 정수는 출발이 아니라 귀가에 있다. 그러므로 여행자는 일시적인 상태일 수밖에 없다. 일시적인 상태에 머무르려 하면 얻게 되는 것은 오직 불안 뿐이다. 불안은 삶의 누수다. 질질 새는 삶을 수리하지 않고서는 무엇도 될 수 없다. 아까 본 영화의 내레이션이 다시 떠오른다. 프로젝터가 벽에 새길 듯이 쏘아대던 글씨들이. “10년간 방랑을 했지만, 배운 것은 전부 볼 수 없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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