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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우 Mar 15. 2022

상경의 값

1

그는 월세 35만 원짜리 오피스텔에 살았다. 동향으로 난 커다란 창은 아침마다 방 안을 주황빛으로 물들였다. 10평짜리방은 수납공간이 많은 빌트인 가구 덕분에 실제보다 더 넓어 보였다. 그는 그 방에 원목 테이블과 전자 피아노, 책꽂이, 평행봉과 철봉이 합쳐진 운동기구를 들여두고 살았다. 1층엔 편의점, 바버 숍, 샐러드 가게, 카페가 있었다. 지하철역까진 걸어서 1분, 창고형 대형마트까진 걸어서 10분이 걸렸고 15분을 걸으면 강에 갈 수 있었다. 강가에선 궁둥이를 치켜들고 수초를 파먹는 오리와 갈대밭을 볼 수 있었다. 봄이면 산책로를 따라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그는 그 강을 사랑했다.


강의 이름은 갑천이다. 그의 갑천 사랑엔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누구나 어떤 장소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나면 그 장소를 조금은 사랑할 수밖에 없으므로. 10대 시절 그는 집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마다 갑천으로 가 달리기를 했다. 20대엔 갑천을 자전거로 오르내리며 대학과 직장에 다녔다. 심지어 그에겐 갑천을 그려 올리는 인스타그램 계정까지 있었다. 그를 아끼는 친구들은 그가 좀 더 ‘크리에이티브’ 한 일을 하길 바랐지만 그에겐 직장이 갑천과 닿아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하지만 강을 인생의 진로를 결정하는 주요 요인으로 삼고 있음을 밝히는 건 어쩐지 부끄러운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그는 핑계를 찾아 말하곤 했다. “여기선 서울에서 다니는 것보다 뭐든 싸게 먹히니까요”. 그러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하긴, 여기가 살기는 좋지”


하지만, 그가 갑천 생활의 모든 면을 만족스러워 했던 건 아니다. 갑천을 차마 포기할 수 없었다고 보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갑천엔 결핍이 있었다. ‘살기는 좋지’란 말은 사실은 ‘살기만 좋다’는 말이었다. 여기엔 없고 저기엔 있는 것을 애써 보지 않으려 자위하는 말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저기'는 언제나 서울이다. 그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늦은 밤 오리가 떠다니는 갑천변에서 늘씬한 자전거를 타고 달릴 때면 그는 서울을 상상했다. 서울엔 '크리에이티브한' 일을 할 수 있는 직장이 있다. '힙'한 가게가 있다. 전시를 골라 갈 수 있다. 그가 사는 동네는 물론 ‘좋은 동네’였지만, 그 평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갑천이 아니라 서울행 고속버스 터미널이다. 그가 사는 동네는 기능적인 관점에서 보면 결국엔 터미널이었던 것이다.


그는 터미널보다 많은 것을 원했다. 왜 그러면 안된다는 말인가? 그는 자신만만한 젊음의 소유자였다. 원하는 모든 것에 도전할 배짱을 갖고 있었다. 그는 원하는 것을 당연히 가질 수 있다고 믿었다. 확신이 너무나 강해서 때로는 이미 모든 걸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에게 가능성이란 손안의 초콜릿 같은 것이었다. 아직 먹지 않았을 뿐인, 자신의 확실한 소유물.


자신의 가능성을 믿는 자는 서울을 그리워하기 마련이다. 서울은 꿈의 고향이니까. 지방 사람은 누구나 몸의 고향과 꿈의 고향 사이에서 딜레마를 겪는다. 이 딜레마야말로 K-지방민의 특성이다. 이들은 언젠가는 애향심과 가능성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데, 그 선택의 무게 추는 서울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서울은 노력의 대가이며 승리의 표식이므로, 서울을 고르지 않는 것은 약간 무능하고 나약한 일이 되기도한다. 그래서 해발고도가 특별히 높지도 않은 서울에 가는 걸 두고 '올라간다'라고 말하는 게 이토록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이직 준비를 하는 동안 꿈을 쫓아 멀리 여행을 떠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을 두 권 읽었으며, 퇴사 후엔 말미를 얻어 산티아고 순례길-자아 찾기에 그만이라는 그 유명한 도보여행지-를 다녀오기도 했다. 스페인 북부의 오솔길에서 그는 인생은 하나의 이야기이고, 서울에서 펼쳐질 도전은 그 이야기의 근사한 첫 번째 장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서울의 작은 광고대행사로 이직했다. 방은 인천에 잡았는데, 인천은 엄밀히 말하면 서울이 아니었지만 그에겐 그만하면 서울인 것 처럼 느껴졌다. 어쨌든 지하철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가능성을 손에 쥐고 있는 것으로 여겼듯이, 서울과 지하철만 닿아있다면 서울이나 다름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2

하지만 서울(사실은 인천)에서 그는 불행했다. 일은 그가 생각했던 것 만큼 멋지지 않았다. 이야기와 인생은 전혀 다른 무언가였던 것이다. 서울에서 그가 누릴 수 있는 것은 지하철이 전부였다. 어차피 월급의 25% 정도를 주거비용으로 써야 한다면, 더 좋은 집에서 살고 싶었다. 지하철 밖에서 시간을 더 많이 쓰고 싶었다. 이내 그는 갑천에 돌아가 자전거를 타고 싶어졌다.


물론 서울살이가 그에게만 유난히 가혹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와 비슷하게 살았다. 다들 이른 아침이면 역으로 가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몸을 지탱하기 위해 혈관 속을 쉴 새 없이 흘러 다녀야 하는 세포들처럼. 지하철은 한강을 건너 그들을 일터로 데려다 놓는다.


어느 날 퇴근 길, 어둠에 잠겨있는 한강 위를 지나는 동안 그는 자신의 상황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두 가지다. 1. 갑천. 2. 자신의 가능성(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을 펼칠 수 있는 일자리. 대전엔 1이 있지만 2가 없다. 서울엔 2가 있을 줄 알았는데 1만 잃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대전에 돌아가서 1을 확보한 다음, 2를 탐색하는 편이 더 현명한 처사가 아닐까? 그는 갑천에 돌아가 다른 일을 찾아보기로 마음 먹는다.


두 번째 회사를 퇴사한 날에 그는 팀장과 술을 마셨다. 팀장은 그와 같은 동네 출신이었다. 우연이었다. 팀장은 그의 퇴사 동기를 듣더니 공감과 훈계를 번갈아가며 했다. “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순 없는데”, “하긴, 촌놈들이 서울 와서 산다고 고생이지”. 술이 조금 더 취하자 그는 어순을 뒤죽박죽 바꿔서 말하기도 했다. “촌놈들이 하고 싶은 대로만 살 순 없는데", “하고 싶은 일 한다고 고생이지. 서울 와서. 촌놈들이.“



3

그는 갑천으로 돌아갔다. 다시 강가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리를 구경했다. 운이 좋은 날이면 수달과 가마우지를 보기도 했다. 그는 갑천에서 하고 싶은 일로만 한번 살아보기로 마음 먹는다. 원하는 삶의 방식이 기성품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으니 스스로 만들어보는 데 도전하는 게 순서인 듯싶었다. 레디 메이드 인생보다는 핸드 메이드 인생이 더 폼도 나고, 값을 부르기도 더 좋다고 느껴졌다.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의 창조. 그것은 시대의 유행이기도 했다.


그는 많은 것에 도전했다. 프리랜서로 이전에 일했던 회사의 일을 받아서 하기 시작했고 이따금 운동 삼아 자전거로 배달을 하기도 했다. 주 3회 독서실에서 총무로 일하며 책을 읽었고 종종 대학시절 일했던 바에 가서 대타로 일하며 술을 공부하기도 했다. 생활비를 충당하고 남는 시간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플랫폼 노동과 파트타임 일자리가 그가 원하던 뉴-라이프스타일이라고 할 순 없었지만 단지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당장은 견딜만 했다. 그에겐 4대 보험의 울타리 밖에서도 삶을 이어갈 수 있는 낙천성과 체력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낙천성과 체력은 결국엔 한계가 있는 자원이다. 게다가 할증요금도 붙는다. 가장 친한 친구도 그의 글을 읽지 않을 때, 이전보다 더 많이 일하고 더 적은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을 곱씹을 때, 친구의 결혼식에 다녀올 때, 그는 불안으로 값을 치렀다. 청구서를 받는 주기는 점점 더 짧아졌다. 갑천에서 그는 자기 시간의 주인이었으나 세상에선 작은 의자 하나도 갖지 못했다. 그는 시시각각 기회의 문이 닫히고 있다고 느꼈다.


실제로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그가 스스로에게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창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동안 1년이 지났다. 그는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고 다시 직장을 구하기로 했다. 이제는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크게 상관 없었지만, 면접을 보러 오라는 회사들은 대개 서울에 있었다. 우연이었다.


면접 보러 가는 길, 서울행 기차에서 그는 생각했다. 세상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한편엔 나고 자란 곳을 사랑하면서도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굳이 고향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이들은 불필요한 감상에 젖을 필요가 없으므로 현명하다. 다른 한편엔 결단을 내려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따금 뒤돌아 두고 온 것들을 바라봐야 하므로 그들은 미욱하다. 그들은 언제나 탈것에 몸을 싣고 있다. 그들의 고향은 터미널이다. 고향을 토로하는 이들은 사실 고향이 없다. 상경은 잃는 것은 구체적이고 얻는 것은 막연한 도박이다. 선택에 내몰린 이들의 선택이다.


그의 새 직장은 이전에 다녔던 회사들보다 더 작은 곳이다. 경력에 쌓인 먼지를 닦아내고 쾌활함을 연기한 삯으로 작은 의자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언제부터 출근할 수 있으세요?” “죄송합니다만 제가 원래 대전 살아서요. 방을 구해야 하거든요. 2주 정도만 양해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는 방을 알아보러 간다. 갑천을 따라 간다. 갑천변의 자전거도로는 대전역으로 이어진다. 경부선을 따라 서울역으로 간다. 지하철을 타고 금천을, 연신내를, 마곡을, 낙성대를 살펴본다. 가진 돈에 맞춰 겨우 구한 방은 갑천변의 오피스텔과는 많이 다르다. 깨끗하지도 좋지도 않다. 넓이는 5평, 창문으론 벽이 보인다. 전자 키보드도 원목 책상도 놓을 수 없다. 벽 한쪽 구석엔 기름때가 시커멓게 앉아있다. 그의 눈길이 기름때에 머무는 것을 보고 중개인이 말한다. ”저기가 침대가 있던 자린데, 저게 다른 게 아니고 머릿기름이에요. 이전 주인이 여기서 4년 살고 나갔어요. 문제없이. 4년이나 살았으면, 살만한 방이란 거죠.” 그는 중개인에게 생긋 웃어 보이며 말한다. “네, 좋네요. 감사합니다.”


대전에 돌아와서 그는 많은 것을 버렸다. 갖고 있던 책 대부분을 중고서점에 팔았다. 전자 키보드와 철봉은 친구에게 줬다. 크게 아쉽진 않았다. 그다지 원하지 않는 것을 위해 정말로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도 무덤덤할 수 있는 방법은, 원하는 마음 자체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애초에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던 것처럼. 모든 걸 움켜쥐고 포기하지 않으려는 자는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욕망은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뇌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이 많을수록 운신의 폭은 좁아진다. 결국 미니멀리즘이 답이다. 마음도 가볍게, 몸도 가볍게. 노트북 하나에 맞춰서 몸과 마음의 용량을 줄여야 한다. 그는 캐리어 하나로 이사를 마쳤다.



4

그의 부모도 비슷한 시기에 이사를 갔다. 그의 부모는 많은 것을 할 줄 알지만 단 하나, 돈을 쓰는 법만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 덕에 여태껏 가난하진 않았지만, 앞으론 결국 가난해질 것이다. 늙어가므로.


또 그들은 물건을 버릴 줄 모르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이사를 돕는 내내 실랑이를 해야만 했다. 젊은 그가 늙은 부모에게 호통을 친다. 버려야 한다고, 버리지 않으면 어디로도 갈 수 없다고, 인생은 결국엔 버리고 움직이는 여정이란 걸 왜 모르느냐고! 그는 민첩한 동작으로 낡아빠진 책들을, 한 시절 몸을 감싸줬던 옷들을, 낡은 소파를, 이불을, 언젠가 가족여행을 가면 쓰자며 주워왔던 텐트를 내다 버린다.


새로 들어간 집은 텅 비어있었다. 그의 가족이 한 때 사랑했던 물건은 과거처럼 사라졌다. 이사를 끝낸 날, 그는 수산물 시장에 가서 랍스터를 샀다. 그는 사치까지 독학할 줄 아는 세대였던 것이다. “이제 다시 취업도 했으니 이런 거 한번 먹읍시다!” 그의 가족이 둘러앉아 랍스터처럼 비싼 음식을 먹는 것은 처음이었다.


손목에 관절염을 앓기 시작한 그의 부친은 랍스터 껍질을 잘 까지 못했다. 보다 못한 그가 랍스터의 껍질을 부쉈다. 흰 속살을 고추냉이를 푼 간장에 찍어 먹으며 그의 부친이 말했다. “모든 게 점점 더 나아질 거다”


랍스터는 이론상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한다. 점점 길어지며 세포를 노화시키는 단백질이 탈피를 하고 나면 새것처럼 짧아진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원히 살지 못한다. 랍스터의 주된 사망 원인은, 역설적이게도 탈피다. 탈피를 반복하다 보면 껍질이 지나치게 두꺼워져서 랍스터는 자기 힘으로 껍질을 벗어낼 수 없게 된다고 한다. 껍질을 벗지 못하는 랍스터는 결국 그 안에서 질식해 죽게 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탈피를 멈추지 않는다. 모든 것을 걸고, 끊임없이 집을 옮기며, 영생을 향해 나아가는 오만한 동물. 이사를 축하하는 자리에 랍스터만큼 적당한 음식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는 열심히 랍스터의 껍질을 부순다. 그에게 랍스터가 말한다. 아니, 말한 것은 조각나 바닥에 뒹굴고 있는 랍스터의 껍데기인가? 랍스터의 까만 눈이 빛난다. 까만 눈은 자신의 살을 파내 들고 있는 더 이상 젊지 않은 아이에게, 갑천으로 돌아왔으되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무능한 방랑객에게, 고향도 가능성도 파먹어버린 오만한 정신의 동지에게 덕담을 건넨다. “넓은 세상으로 가게 된 걸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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