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남은 오늘도 편의점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었다.
형광등 아래, 계산대 너머로 하루에도 수십 명의 손님이 지나갔지만
그의 시선은 늘 조용히 아이들에게 머물렀다.
특히, 해지 또래의 여자아이가 혼자 들어올 때면 진남은 사비로 사둔 사탕 하나를 꺼내 건넸다. 아이들은 고맙다고 말하며 웃었고, 진남은 그 웃음 속에서 해지의 미소를 떠올렸다. 그건 단순한 친절이 아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사탕 하나는 해지를 지키지 못했던 그리고 외면했던 자신에 대한 작은 속죄였다.
그때, 또래의 30대 중반 여자 손님이 조용히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천천히 진남의 앞으로 다가와 말을 꺼냈다.
“혹시… 진남 씨 맞으세요?”
진남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 이름을 누군가가 부른 건 오랜만이었다.
“네… 그런데요.”
리원은 조심스럽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해지의 사고 기사 복사본. 그리고 그 아래, 작게 적힌 ‘진남(목격자)’이라는 이름.
“믿기 어려우실 수도 있지만… 저는 해바라기 소녀 그림을 통해 꿈속에서 슬픈 모습의 해지를 만났어요. 그 아이가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 아이가 남긴 흔적을 따라가고 있어요.”
진남은 그 말을 듣고 손에 쥐고 있던 사탕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편의점 안은 고요했고, 둘 사이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리원은 조용히 말했다.
“그 아이와 친분이 있었다고 했죠? 그때 정말 도망친 남자가 누구인지 모르시나요?"
진남은 그 말에 숨이 턱 막혔다.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고, 눈빛이 흔들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그는 차갑게 말을 뱉었다.
"네, 몰라요 누구인지. 그때 경찰에도 사실대로 다 얘기했고 저는 더이 상 할 말이 없습니다. 그만 돌아가보세요."
갑자기 변한 진남의 태도에 리원은 당황했다.
그의 눈빛은 분명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리원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조용히 편의점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 가을 저녁 공기가 차갑게 스며들었다.
리원은 우두커니 서서 편의점 유리문 너머 진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 말할 준비가 되지 않은 거야.’
그녀는 그림 속 해지를 떠올렸다. 말없이 바라보던 그 눈빛.
그 눈빛이, 지금 진남의 눈과 겹쳐졌다.
‘조금만 더 기다려줘. 그 사람의 마음이 열릴 때까지.’
편의점 문이 닫히고, 리원의 발걸음이 멀어졌다.
진남은 계산대 뒤에 그대로 서 있었다.
손에 쥐고 있던 사탕은 이미 녹아 있었고, 형광등 불빛은 오늘따라 더 차갑게 느껴졌다.
그녀가 꺼낸 종이 한 장. 해지의 사고 기사. 그리고 그 아래, 작게 적힌 자신의 이름
‘진남(목격자)' 진남은 그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우려 했지만, 그날의 기억은 이미 문을 열고 들어와 있었다.
그는 조용히 계산대 아래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엔 해지가 처음 건넸던 초콜릿 사탕이 작은 유리병에 담겨 있었다.
이미 오래되어 먹을 수는 없었지만, 진남은 그것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유리병을 꺼내어 손에 쥐었다. 손끝이 떨렸다.
‘그날… 나는 도망쳤다.’ 진남은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경찰에게도, 동네 사람에게도. 그저 “모르겠다”라고 말하며 자신을 지워버리려 했다.
하지만 해지는,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도움이 필요하다는 눈빛으로. 믿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지켜줄 거라고. 진남은 유리병을 꼭 쥐며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해… 해지야.”
그 순간, 편의점 안의 공기가 조금 흔들렸다. 형광등이 미세하게 깜빡였고,
진남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외면했던 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