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쓰는 솔직한, 자아 성찰의 글
인류학과에 복수전공을 하겠다고 수업을 들으러 갔을 때, 놀랐던 것은 거의 모든 과목에서 거의 매주 '쪽글 쓰기'를 과제로 내주는 모습이었다.
처음 쪽글을 제출한 다음 날 한 교수님이 나를 불렀다. 주제와는 잘 맞지만 네 생각, 네가 어떤 사람이 담기지 않아서 좋은 글이 아니라고 하셨다. 처음부터 다시 쓰라는 말씀과 함께.
그때 느꼈던 충격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전까지 나는 누군가의 이론을 요약하고 혹은 어떠한 현상에 대해 분석하고 그것에 대한 짧은 의견을 쓰는 방식의 글을 많이 썼다. 그리고 그렇게 글을 썼을 때 그 누구도 나에게 '글에 네가 없다'며 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글로 학점을 받곤 했으니.
그 날 이후로 나의 글쓰기 스타일은 완전히 달라졌다. 상황 설명, 문제 분석은 굳이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래서 그게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왜 나는 그것을 중요하다 생각했는지 '내 이야기'를 최대한 많이 담으려 노력했다.
이렇게 '내 이야기'를 솔직하게 담은 글은 인류학과 교수님만 좋아하는 글쓰기 스타일이 아니었다. SNS에 글을 올리면 많은 사람들이 좋아(요)해주었다.
좋으면 뭐가, 왜 좋은지, 힘들면 뭐가, 왜 힘든지, 솔직하게 쓰는 글이 얼마 없어서인지 사람들에게도 인상 깊었나 보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면 늘 "글 잘 보고 있어"라는 말을 듣곤 했다.
일을 하면서도 내 이야기가 담긴 글을 쓰려고 노력했다. 일과 관련된 내용이더라도, '나'는 어떻게 일을 하고 있는지, 뭘 느꼈는지, 어떤 걸 배웠는지 고민하고 정리해서 공유하는 방식으로 글을 썼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남의눈을 많이 의식하기 시작했다. SNS 상에서 포지셔닝한 '스타트업 마케터'라는 이름에 걸맞은 글을 써야 하지 않을까? 글 잘 쓴다고 칭찬해주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글을 써야 하지 않을까? 글을 쓰고 싶으면 그냥 쓰면 되는데, 글 쓰기 전에 참 생각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점점 '내 글'에 내가 없어지고 그냥 '글'만 남았다. 그러다 보니 쓰는 나도 재미가 없어졌고, 읽는 사람들도 그걸 느꼈을 것 같다.
오늘은 동아리 선배님 한 분을 찾아뵈었다. 바쁘신 시간을 쪼개어 불러주시기에 한 걸음에 달려가 무려 한 시간 반 동안이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왔다. 그 과정에서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선배님도 지켜보는 한 사람의 입장에서, 예전 같은 에너지가 느껴지지 않았다고 하셨다.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남이 뭐라고 생각하든 말든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을 하고 그것에 책임지며 살면 된다, 고 생각은 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남을 많이 의식하고 있었구나. 마치 내가 '뭐'라도 되는 양, 힘이 많이 들어갔구나. 반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굉장히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자아 성찰을 하는 글을 써보려고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건 누군가의 좋아요도 바라지 않고, 그냥 내가 쓰고 싶어서 쓰는 글이다. 과거의 내가 잘 써왔던, '내가 담긴 글'을 오랜만에 써보고 싶었다.
요즘 나는 고민이 많다. 앞으로 뭘 해 먹고, 어떻게 살아야 하지. 20대 때 그런 고민을 끝내 놓으면 30대 땐 안 할 줄 알았는데, 인생 선배들 말로는 40이 되어도, 50이 되어도... 아니 죽을 때까지 그 고민을 한단다.
그렇다면 별 수 있나,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매일매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부하고, 배우고, 나누며 살 수밖에. 그리고 그 과정을 즐기며 사랑하며 사는 수밖에.
엊그제 완독 한 김민식 PD님의 <매일 아침 써봤니?>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저는 1인 기업 '주식회사 김민식'의 창업주이자 대표이사입니다. 제게는 '김민식'이라는 이름의 많은 직원이 있어요. 회사 생활 열심히 는 김민식도 있고, 육아와 살림에 집중하는 김민식도 있고, 휴가를 즐기고 여행을 다니는 김민식도 있죠."
나의 상황에 빗대어 보자면 요새 '일하는 김지영'은 파업을 선언했다. 잠깐! 방향 설정 제대로 한 거 맞아? 멈춰 서서 두리번거리고 있다.
과거에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가는지, 공부도 해보고 직접 만나러도 가보고 그랬다.
그런데 내가 '일하는 김지영' 이 어떤 커리어 패스를 그리며 가고 싶은지, 상상하고 준비하고 선택하는 것은 결국 내 몫이며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고 있다.
어렴풋이 알 것 같으면서도 이게 맞나 갸우뚱하게 되는 거, 그러면서도 계속할 수밖에 없는 거. '일하는 김지영'은 일이라는 것을 그만두는 그 날까지 그런 상태로 쭉- 갈 테고, 다만 나는 덜 스트레스받는 쪽, 나를 더 존중해주는 환경인지 고민하면서 선택해나가야할 뿐.
생각이 많이 정리되고 에너지도 다시 차오르기 시작하니 '글쓰기 김지영'도 슬슬 다시 기지개를 켜려고 한다.
솔직한 이야기를 담은 글, 특유의 자아성찰 글. 내가 좋아했던, 잘 해왔던 그런 글을 쓰려고 발동을 건다. '뭐가 되려고 하지 말고, 그냥 김지영 네 이야기를 써'라고. 오늘 쓴 이 글은 그 증거이자 다시 시작하는 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