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9일. 월. 새벽 1시.
나는 자신이 없다. 삶이 너무 무겁고 버겁다. 자신만만하고 세상 무서울 것이 없던 나는 사라졌다. 한없이 작고 초라한 내가 있다. 삶을 감당할 자신도 없으면서 죽을 용기도 없다. 어찌어찌 버텨가는 인생이 되었을까. 예전의 나는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지금의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길을 잃었다. 어쩌면 확신이 사라진 걸지도 모르겠다. 20대 초반에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자신감에 차서 나는 뭐가 다르고 특별하니까 더 빛나는 삶을 살 거라던 확신. 지금은 그저 눈앞이 캄캄하다. 일 년 후 이년 후 알 수가 없다. 알 수 없을 뿐이나이라 의욕조차 없다. 내 삶을 살아야겠다는 의욕. 내 삶을 무언가로 충만하게 채우고 싶다는 의욕. 내 삶 속에서 긍정적인 빛나는 것을 만들려고 했던 의욕이 사라졌다. 다 어디로 갔을까. 왜 없어졌을까? 연속된 거절에 지친다. 미래도 사랑도 나를 거절한다. 매우 미안하지만 넌 적합하지 않아. 수십 통의 거절 메일을 받고 반복되는 소개팅 거절도 상처다. 나는 고장 난 사람인가. 나는 하지 있는 물건인가. 반품 처리되는 그런 폐기품인가. 자존감을 좀먹고 생의 의욕을 저하시키는 거절의 연속이 버겁다. 나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 좋은 부모님, 학위, 그럭저럭 쓸만한 월급과 나쁘지 않은 근무환경, 가끔 만나도 나를 이해해 주는 소수의 친구들, 나를 대단하다고 여겨주는 동생, 착한 내 동생, 기특한 내 동생. 왜 나는 내가 기특하지 않을까. 왜 나는 내가 한심할까. 서른이 다 된 나이임에도 앞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는 건가. 제대로 모아놓은 돈도 없다. 유학. 말은 좋지 가기 싫다. 또 무슨 공부? 머리 아프고 힘들다. 공부는 나를 힘들게 해. 부모님 기대도 힘들다. 내가 교수가 되길 바라시지. 좋은 직업인 것은 알고 있지만 얻기 위해 희생해야 하는 것이 많다. 결혼 문제는 또 어떻고. 결혼할 수나 있을까? 마음 맞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나한테 매력이 없나? 난 별론가? 그런 생각을 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 한 고비 뒤에 또 한 고비가 오는 것이 인생이라던 최교수님의 말. 인생은 고통이고 고난의 연속이라고. 그러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다 부담스럽고 다 별로다.
11월 7일.
나는 아마도 이 모든 것들이 하기 싫어서 뒤로 미루는 것일지 모른다. 가장 무겁게 나를 짓누르는 것은 나의 미래이다. 유학을 가고 박사학위를 받고 어딘가에서 교수로 정착하는 것. 영원히 부유하고 싶은 인생인데 어느 한 곳에 닻을 내리고 살아간다는 것이 견딜 수 없이 끔찍하다. 그것과는 별개로 다들 하는 결혼은 나도 하고 싶은 것이다. 이대로 미국이나 캐나다나 영국이나 유학을 떠나버린다면 영영 결혼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다가도 도대체 결혼이 무엇이길래 내가 내 미래조차 제대로 결정할 수 없냐는 한심한 생각이 들디고 한다. 우리들 인생은 마치 쏘아진 화살 같다. 그 화살이 얼마나 멀리 날아가는가는 처음 쏘아질 때 활시위의 단단함, 바람의 방향과 세기, 화살의 날렵함과 같이 이미 주어진 것에 달려있다. 이미 주어진 것, 활시위를 당기는 사람의 힘, 부모님의 능력, 바람, 운, 화살의 날카로움. 내가 얼마나 갈고닦았는가.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가를 대입하다 보니 내가 스스로 개척하고 개선할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쏘아진 화살을 언젠가 그 힘이 다하면 바닥이든 과녁이든 꽂혀 영원히 멈출 수밖에 없다는 것. 그 유한의 궤도가 못내 서글퍼졌다. 당긴 활시위에서 떠나버린 화살. 끝이 보이는 것이 인생이고 그래서 허무가 찾아온다. 나 이전의 수많은 사람들이 해왔던, 그리고 앞으로 내 앞에 놓일 수많은 인생들이 할 인생의 목적에 대한 고민은 영영 끝나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명쾌한 답을 내주지 않는다. 답도 없는 고민을 하는 것이 시간 낭비 일까. 자기 수양의 길. 한 단계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일까. 아니, 인생의 목적에 대한 대답을 깨우쳤단들 그 삶이 더 의미가 있고 더 나아질까.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생각이 꼬리를 무는 걸 보면 세상 참 편하게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많으니 글을 더 쓴다. 할 일은 많은 데 암담한 기분이니 시간을 죽일 겸 되지도 않는 독백을 늘어놓는 것이다. 요즘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있다. 니체는 기존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큰 것 같다. 기독교에서 강요하는 규율화된 삶에 대한 반감과 증오까지도 보이는 것 같다. 인생관 자체를 고난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나와 비슷하다. 나도 마치 패배자와 같은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이미 마음속으로 패배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정말 진 것과 진배없다. 삶은 이기고 지고의 문제는 아니고 다만 누가 끝까지 버틸 수 있는가의 문제 같다. 그런데도 패배감이 든다는 것은 이미 버틸 힘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뜻 같다. 아무튼 버티기 위해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할 텐데 영 지구력이 달리는 것이다. 기초체력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롱런의 비결은 완급조절 아닌가? 너무 빨리 달려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십 대와 이십 대. 터널 밖은 밝고 빛날 거라면서 엄청 최고속력으로 쉬지 않고 달려왔던 그때가 있었기 때문에 막상 터널을 통과하고 나니 남아있는 것은 지친 몸과 허기진 배와 퉁퉁 붓고 멍이 든 마음뿐이다. 무엇을 위해 달리는 지도 모르면서 그냥 다들 달리고 있으니까 멍청하게 따라갔던 거다. 이기기 위해. 내 옆에서 같이 달리고 있던 놈들보다 앞서 가고 싶어서 내게 주어진 것과 내게 주어진 길과 내가 가야 하는 속도를 모두 무시하고 전력으로 질주해 버렸다. 이긴 줄 알았던 결승선에는 또 다른 출발선이 놓여있었을 뿐이다. 이미 체력이 방전된 나는 더 이상 달릴 수 없음을 느끼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쉼은 좋았다. 바람이 이마를 식혀주었고 그동안 터널이라고 생각했던, 그래서 주변은 온통 어둠뿐이고 눈앞에 보이는 저 하얀 동그라미가 출구라고 믿어왔던, 그곳은 사실 푸른 들판이었고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자작나무 숲도, 메타세쿼이아가 가로수로 늘어진 아름다운 길도 모두 놓쳐버린 것이다. 내 20대 결승선에 멈춰 서서, 아니 이제는 주저앉아 30대 출발선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경주에서 승리하였는가? 무엇을 이겼나. 주저앉은자리는 편하지만 축축한 불안이 스며들과 있다. 따뜻한 햇볕을 쐬고 있지만 엉덩이를 붙인 땅은 점점 진흙탕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 섬칫한 축축함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지만 당장의 따뜻함과 그제야 눈에 들어온 아름다운 풍경 때문에 일어나기가 싫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머지않아 이 진흙은 늪이 될 것이고 나는 속절없이 그 아래로 침절할 것이다. 그대로 박제되어 버린 샘으로 살아갈 것인지, 지금 엉덩이에 묻은 진흙의 찌꺼기를 털어내고 다시 경주를 시작할 것인지는 아마도 나에게 달려 있겠다. 이 모든 것을 통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게으름과 하기 싫음에 발이 묶여 예쁜 나비들만 쳐다보고 있다.
11월 9일.
깜박하고 만년필을 집에 두고 왔다. 아빠가 누구 과외해주고 과외비 대신에 받았다는 몽블랑 노블레스 금색 만년필과 볼펜세트는 나보다 나이가 많다. 1980년대 제작했다고 하니 지금 30을 넘은 것인데 아직도 잘 써진다. 펜으로서 다해야 할 사명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볼펜은 안에 리필만 잘 갈아 끼우면 되고 만년필은 잉크를 충전하면 된다. 솔직히 글씨 쓸 때의 그립감은 시중에 나와있는 다른 펜들에 비해 떨어지지만 번쩍번쩍 황금색 몸체와 꽁무니에 새겨져 있는 몽블랑의 육각별모양이 우쭐대고 있어 사용하는 나까지 우쭐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허겁지겁 가방을 챙기는 바람에 만년필을 빠뜨리고 왔다 사무실에 있는 아무 펜으로 쓰고 있는데 이 또한 나쁘지 않다.
사무실에 오자마자 보통 하는 일은 컴퓨터를 켜는 것이다. 그리고 인터넷 창을 열고 메인화면인 네이버에서 그날 선택해 준 기사와 캐스트 목록을 훑는다. 요즘에는 최순실, 정우나, 미르재단과 같이 ‘비선실세’라는 것으로 떠들썩하다. 그건 그렇고 무슨 마음을 치유하는 글쓰기라는 포스팅이 눈에 띄었다. 읽어보니 하루에 한 번, 아침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자기의 생각과 감정을 A4용지 한 페이지 정도 써보는 의식이 얼마나 감정적 안정에 도움을 주는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 포스팅을 읽기 전부터 그렇게 하고 있어서 다시금 내 행위에 대한 긍정적 피드백이 되었다. 나의 이전 글쓰기를 다시 읽어보면 대부분 그날그날의 일정에 대한 단순 나열이 많았다. 누구를 만났고 무엇을 먹었고 무엇을 샀는지. 그러나 그런 행동들을 통해 내가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에 대한 내용은 잘 없었다. 스스로 내 기분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였는지, 행동나열을 돼짚어보면 그때의 감정이 살아날 거란 생각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의식의 흐름기법으로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내면 기분상이라도 홀가분함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대나무숲에서 외쳤나 보다. 어딘가 털어놓고 싶은데 그런 큰 비밀을 아무에게나 말할 수 없으니 듣는 이가 없는 대나무 숲에서 말이다.
11월 10일. 새벽 4시.
문득 잠에서 깼다. 한 번 달아난 잠은 쉬이 돌아오지 않는다. 어제 사상은 뒤집혔고 미래는 더욱 불투명해졌다. 안 그래도 이미 슬픔은 포화상태인데 세상은 또 나를 울리고 만다. 어제는 정말 오랜만에 D와 G를 만났다. D는 긍정적인 마음과 삶에 대한 적극성으로 권태기와 우울 기를 극복했다고 했다. 좋은 에너지를 얻었다. G는 나와 비슷하게 30대가 느끼는 불안과 우울에 쌓여 있었다. 미래는 안정적일 수 없고 세상은 더욱 막막한데 어디에 발을 딛어야 할지 모르는 데서 오는 절망일 것이다. 결국 삶의 무게가 무거워지는 것인데 이것은 아무 생각 없이 산다면 또 그만큼 가벼워지는 것이다. 다만 아무 생각 없이 살기엔 우리의 나이가, 시대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내 인생의 점을 이으면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 큰 사건은 큰 점으로 작고 소소한 일들은 작은 점으로 찍고 시간순서와 관계성에 따라 점선과 실선으로 연결해보고 싶다. X축은 지역 Y축은 그때의 감정, 아래로 갈수록 부정적인 감정, 위로 갈수록 긍정적인 감정. 그러면 지역과 감정사이의 관계성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점을 찍고 선을 그으면 어떤 형태가 나올 것이다. 면도 생기겠다. 그러면 그 면을 채색하는 것이다. 색은 마음대로 정할 거다. 그래서 전체를 보면 아주 아름다운 그림이 될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삶의 이야기를 글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추상화시켜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참 진부한 듯하면서도 가장 오래된 창조라는 점에서 믿을만하다.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다. 아직 서른 해밖에 살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인생은 지루하고 갑갑하게 옥죈다. 앞으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일을 해서 키우고 사는 것이 너무나 뻔한 결말을 향하는 지루한 영화 같아서 그만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삶에서 다이내믹하고 즐거운 일이 가득하길 바라지만 그러기에는 지켜야 할 약속과 책임이 무거운 것이다. 그만하고 싶다는 말이 수없이 떠오른다. 그렇다고 마냥 무기력하고 우울한 것은 또 아니다. 작은 일에도 기뻐할 수 있고 맛있는 것을 먹으면 단순하게도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방편일 뿐 어찌 됐든 계속해서 나를 쫓아오는 삶의 허무와 공허함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들 그렇게 허무와 공허를 채우려고 아등바등 살아가나 보다. 그 채움이 돈이든 권력이든 쾌락이든 각자의 가치관과 선호에 따라 결정되는 것 같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먼데 벌써 지쳐있다. 안개가 껴있고 발 밑조차 잘 보이지 않는 이 어스름한 공간에서 나는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고 있다. 마치 열심히 표시된 길을 따라 걷던 앨리스가 그 길이 다 지워져 버리는 걸 봤을 때의 느꼈던 절망과 두려움일 것이다.
11월 11일.
깜빡하고 또 만년필을 두고 왔다. 연구실은 덥다. 지하철도 더웠다. 옷 한 겹 벗어야겠다. 가을과 겨울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오늘은 가을의 승리인가 보다. 많이 안 춥다. 오히려 밖의 찬 바람이 시원하다.
11월 12일.
생각을 풀어놓는 것은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긍정적인 일인가 보다. 오늘 아침 맑은 기분으로 일어났고 기분이 좋다. 오늘은 H를 만나러 범계에 간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거라 신나고 떨린다. 일찍 가서 미리 생일선물을 사둬야겠다.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밀린 수다를 떨어야지. 그러고 보니 수다는 왜 떠는 것일까? 말을 하는 거고 얘기를 하는 건데 수다는 왜 떤다가 일반적인 표현이 되었을까? 수다는 우리말로 한자가 없다. 뜻은 ‘쓸데없이 말수가 많음. 또는 그런 말’이다. 후자로 쓸 때는 동사가 늘다, 들어주다, 늘어놓다, 부리다, 피우다, 떨다 등이 있다. 연관 검색어로는 수다를 떨다, 방정을 떨다, 내숭을 떨다가 있다. 떨다의 뜻은 ‘(동작이나 성질을 나타내는 일부 명사 뒤에 쓰여) 그런 행동을 경망스럽게 자꾸 하다, 또는 그런 성질을 겉으로 나타내다 ‘이다. 그러고 보니 수다, 방정, 내숭은 동작을 나타내는 명사고 경망스럽거나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이다. 수다를 떠는 것은 결국 쓸데없는 말을 경망스럽게 자꾸 하는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경망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 자체가 부정적으로 수다를 떨다는 표현은 우아하거나 교양 있어 보이지는 않다. 어쩌니 저쩌니 해도 오늘 나는 H와 시끄럽게 수다를 떨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떨어져 있던 시간과 공간의 간격을 메꿀 수 있기 때문이다.
11월 14일.
내 속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채워져 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멍들고 썩어가는 과일과 같이 흉측하다. 질투, 원망,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 수치, 열등감, 교만함, 자만심, 허영, 욕심 그런 것들이 널려있다. 서로 엉키고 설켜서 답답한 마음이 들고 격동된다. 그건 내가 고요할 때 들여다본 모습. 세상의 탈을 쓰고 일상으로 젖어들면 잘 보이지 않는 상자 안에 갇혀있는 형상들이다. 또 다른 방에는 기쁨이 있다. 요즘 나의 기쁨은 국카스텐의 노래를 듣고 인터뷰를 찾아 읽고 유튜브 영상을 보는 것. 이 덕질을 통해 나는 나의 고요보다 타인의 소요를 바라보는 것이다. 내 괴로움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나와 같이 괴롭다고 절규하는 그들의 노래를 감상한다. 이 기쁨의 원천은 그러면 동감과 공감대의 형성인가.
예전만큼 우울하거나 힘들진 않다. 그다지 쓸모 있는 인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만큼 값없지도 않은 것 같다. 그냥 보통의 삶. 내가 나에게 가지고 있는 그 높은 기준이 한결 무너져 내렸는지 부담이 덜하다. 일은 많고 신앙은 어렵지만 그럭저럭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가 사고 싶을 때 쓸 돈을 벌 수 있고 좋아하는 노래를 듣는 것이 나쁘지 않다. 요즘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을 읽고 있는데 인간은 절대로 최상의 행복을 느낄 수 없다. 권태 아니면 고난인데 그 중간은 거의 없다. 최상의 행복은 결국 고난이 아닌 상태. 디폴트 상태라는 말이 참 와닿는다.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최상의 행복은 지상에서 누릴 수 없는 것이다. 창조의 섭리가 그러하다면 나는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 지금인 것이다.
11월 15일.
파마를 했다. 기분이 좋다. 아침에 평소보다 10분 일찍 출발했다. 앞차가 느리게 가고 파란불이 바뀌었는데 출발을 안 해도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10분의 여유가 이렇게 클 줄이야.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을 다 읽었다.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는데 얼른 정리해야겠다. 도예공방에서 파이프를 이용해서 머그컵을 만들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있으면 잡생각이 사라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사색이 되는 것 같다. 흙은 단단한 듯하면서도 유동적이어서 내가 이끄는 대로 모양을 바꾼다. 천이백 도의 뜨거운 화염 속에서 열두 시간씩 세 번 구워져야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강도의 그릇이 된다니. 우리의 인생에 던지는 의미가 있다. 쓸모없는 수분과 찌꺼기를 모두 태워버리고 중요한 알맹이만 남아서 더욱 촘촘히 견고해지는 것이다. 멋있다.
11월 17일.
정신없이 바쁘면 글 쓸 시간도 없어진다. 사실 일이 바빴다기보다는 그냥 다른 할 일이 생긴 것이다. 요즘에는 캘리그래피에 관심이 생겼다. 어제 집에 오는 길에 강남역 알파에서 충동적으로 수채물감과 화홍 붓세트를 샀다. 그냥 아무 말이나 쓰기 시작했는데 나는 만족스럽다. 아빠한테 자랑을 했는데 무슨 ㅅ이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했다. 기분이 나빴다. 그냥 취미로 하는 거고 처음 써본 것 치고 만족스러워서 뿌듯한 마음에 칭찬받고 싶어서 이야기한 건데 완성도 타령이라니. 격려와 칭찬이 아니라 지적이라서 싫다. 김이 팍 센다. 아빠는 거의 항상 그런 식이다. 뭘 잘했다고 하기보단 지적하기 바쁘다. 피아노 칠 때도 엄청 핀잔. 이에 대해 얘기하니 아빠는 또 나의 발전을 위해서란다. 나는 별로 발전하고 싶지 않은데. 그냥 지금 상태가 좋고 안주하고 싶은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해야 하는지 통 모르겠다. 현재가 만족스럽고 소소한 기쁨을 느낄 수 있으면 된 거 아닌가!
11월 21일.
시간이 너무 휙휙 지나간다. 사람을 판단할 때는 외모보다는 인품과 말하는 것을 더 보게 된다. 다만 함정은 외모가 어느 정도 호감형일 경우 기본적으로 좋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인상이 나쁘면 무슨 좋은 얘기를 해도 통 관심이 안 생기는 것이다. 오늘 또 충동적으로 수원 콘서트 좌석을 예매했다. 아직 입금은 안 했는데 가고 싶다. 만약 유학을 간다면 결혼은 안 할 각오로 나가야겠지만 아직 그럴 각오가 안 섰다.
11월 28일.
일이 너무 바쁘면 시간을 내서 글을 쓰는 것은, 그것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손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거의 사치이기까지 하다. 일찍 집을 나서서 거의 1시쯤 천안 할머니댁에 갔다. 큰아버지가 문을 열어주셨는데 그 입에서는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는가 보다. 엄마가 싸준 반찬과 전등을 보더니 뭘 이런 걸 가져왔냐며 반찬은 고마워하는 것 같았지만 전등은 필요 없다며 투덜거리는 투로 말했다. 집안에서는 코를 찌르는 쉰내? 뭔지는 모르겠지만 불쾌한 냄새가 났다. 할머니 방은 그나마 덜했던 것 같다. 할머니는 생의 모든 과육이 빠져나가버려서 쪼글쪼글하고 메마른 상태로 모로 누워 계셨다. 당신의 이불을 둥지 삼아 똬리 튼 작고 작은 할머니는 식사 중이셨다. 큰아버지가 밥을 국에 말아서 한 입씩, 반찬도 한 가지씩 떠 드리는데 행동 하나하나마다 온 불평을 말을 뱉었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우리 할머니에게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 오히려 으름장과 겁박같이 느껴졌다. 듣고 있기가 힘들어서 5분인가 앉아있다가 나오려고 할마니께 인사드렸다. 눈도 어두워져 내가 누군지 못 알아보시다가 알아차리시고 세상 허망하고 슬픈 눈으로 원망의 눈으로 허공을 보셨다. 99세 우리 할머니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거동할 힘도 스스로 밥을 먹을 힘도 남아있지 않아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로 연장되고 있었다. 그 5분은 정말 끔찍했고 슬펐고 역겨웠고 참을 수 없었다.
12월 10일.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아무리 타인을 이해해보려고 해도 그 이해의 범위는 나의 경험과 인식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완벽히 공감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널 이해해라든지 혹은 전혀 반대로 네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같은 말은 절대 함부로 내뱉어서는 안 된다. 함부로 누구를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얄팍한 동정이랄까. 사실은 잘 모르면서 위로가 되고 싶다는 이기심으로 남의 속도 모르고 자기 위안을 위한 위안이다. 이해한다고 말하면 내가 좀 더 그릇이 큰 사람처럼 보이겠지 하는. 차라리 널 이해 못 하겠어라는 말은 솔직하다. 하지만 이 또한 적절한 말은 아니다. 널 이해 못 하겠다는 것은 내가 너를 생각하겠다는 의지를 포기한 것 같다. 널 이해할 수는 없지만 네 뜻을 존중한다는 것이 어찌 보면 정답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쉽게 다른 사람의 경험과 생각에서 나온 말과 행동을 내 기준에 맞추길 원한다. 내가 보기에 나에게 좋은 것, 필요한 것,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타인이 보기에 내가 해야 하는 것, 이 두 양극지점 사이에서 갈피를 잘 잡아야 한다.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행동을 하는 것, 비록 그것이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일지라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지고 가야 할 의무 같은 것. 예를 들면 최소한의 의무교육이라든지, 직업을 갖는 것, 세금을 내는 것 등이 있겠다. 어쩔 수 없이 사회의 구성원이 되었으니 그 구성원으로서의 책무를 져야 하는 거다.
종종 생각한다. 나의 삶은 내버려진 것 같다고. 내동댕이 쳐진 삶.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맞이한 세상은 신기하고 놀랍지만 한편으로는 무섭고 두렵다. 내가 선택한 것은 없기 때문에 그 두려움과 막연함이 더 커지나 보다. 나이를 먹으면서 내 자유의지로 선택한 선택들이 싸히면 그래도 그런 막연함이나 무서움이 줄어들 줄 알았다. 하지만 쌓여온 시간만큼, 선택만큼, 오히려 내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기 때문에 나의 책임이 되어버린 수많은 행동과 말의 결과들이 두렵고 무서워진다. 결국 또 깨닫는다. 우리는 너무나 연약하고 위태롭고 약해서 어쩔 수 없어 무엇인가에 의존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