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는 성장했고, 이제 인생이 시작되는 것 같아요

열여덟 소녀의 인생이란

by 아마르기

지금은 토요일 아침 10시 46분입니다. 수능시험을 약 50일을 앞두고 있는 하림이는 고요히 잠들어 있습니다. 웃을 수 없는 상황이지요. 고3 수험생이기에 말입니다. 잠들기 전에는 새벽 세 시까지 대화를 했습니다. 우리의 대화 주제는 도돌이표가 그려진 악보처럼 반복되는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공부하기 싫다'

'대학은 왜 가야 하나?'

'나는 특목고를 갔어야 했다'

'인생은 왜 살아야 하나?'

'동생들이나 잘 키워라'

'나는 예체능 계열로 갔어야 했다'

'전쟁 날 것 같다'

'엄마는 인생을 왜 사냐?'

'나는 재수를 할 거다'

'원래 나는 공부를 싫어하고 못 한다'


등등 이런 내용으로 정답이 없는 주제에 대해 밤새 이야기 합니다.


수험생활이 힘들어서 하소연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자기 성적에 따른 예상 입시 결과가 불만족스러워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공부를 잘하고 싶은 욕망은 큰데 이루어지지 않아서 자신에게 크게 실망한 것 같기도 합니다. 대학 이후의 삶과 인생의 목적에 대한 뚜렷한 상이 그려지지 않아 불안한 것 같기도 합니다. 엄마의 인생이 본받을 만한 롤모델이 아니라서 불평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렇게 하림이는 현재 자신의 모습에 실망이 큽니다. 과거의 내가 상상했던 현재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망한 자아는 어둠을 찾아다니는 괴물처럼 과거의 실수, 잘못된 선택, 부정적인 결과를 수집합니다. 하림이는 마치 꼬여버린 알고리즘처럼 머릿속에 자동으로 떠오르는 부정적인 콘텐츠를 소비합니다.



엄마, 지금까지는 성장했고, 이제 인생이 시작되는 것 같아요.


이 말은 중학교 3학년을 졸업하던 어떤 날 하림이가 했던 말입니다. 이 아이는 중학교 생활을 지나치게 충실히 한 나머지 전교 1등으로 졸업하며 전교생 앞에서 상을 받았습니다. 스스로 뿌듯했을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한 만큼 얻어낸 영광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 단계로 껑충 도약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림이는 어쩌면 '인생'의 단맛이 지속되리라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찌 인생이 그러할까요?


하림이의 고등학교 생활은 인생의 쓴맛을 제대로 가르쳐주었습니다.


자신이 꿈에 그리던 공부 환경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일반고에 있는 각양각색의 친구들과 어울리며 적응해야 했습니다.

남들이 인정하지 않아도 자기 길을 가려고 노력해야 했습니다. 아니, 심지어 다른 사람이 무시하고 비방해도 흔들리지 않아야 했습니다.

딱딱한 학교 제도 안에서 적응하되 순응하지 않고 반응하는 사람이 되었어야 했습니다.

성적은 주어진 환경과 재능과 유전의 산물이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 노력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지임을 배워야 했습니다.

불만스러운 결과, 목표에 도달하지 못해도 자신의 책임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하림이는 아직 인생을 배우고 있습니다. 인생의 쓴맛이 너무 싫고 피하고 싶은가 봅니다. 쉽게 화를 내기도 하고 포기하는 말도 합니다. 그러다 구름 사이로 해가 반짝 비추듯이 가끔은 밝은 얼굴로 '해보겠다'라고 합니다.


어릴 때는 아이가 작은 만큼 문제도 작았는데, 성장한 하림이가 가진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아이만큼 커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게 인생이라는 것을 알기에, 우리 인생은 달지만은 않기에, 지금 겪는 고난이 하림이를 단단하고 겸손하게 하는 재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p.s. 오늘을 마지막으로 <K-고등학생의 말들> 연재를 마칩니다. 인내와 꾸준함이 부족한 저에게 연재 약속을 지키는 것은 훈련이었습니다. 글을 써나가면서 하림이를 지켜보니 조금 더 아이의 입장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하림이를 바라보는 나의 욕망이 드러나 보였을 때는 눈물이 났습니다. 아이가 지금 힘든 것이 엄마의 욕망 때문이 아닐까 하는 죄책감 때문입니다. 여전히 실수하고, 욕심부리는 엄마입니다.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엄마'라는 점에 방점을 두고 힘을 내보려고 합니다. 부족해도 엄마니까, 모자라도 엄마니까. 스스로 되뇌면서 자성의 글을 써가며 그렇게 아이와 함께 할 것입니다. 그동안 읽어주시고 함께 하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