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진과 박찬호

다저스태디움에서 혼자 직관하기

by 아마로네

내 resume의 interest 란에는 'avid baseball fan'이라고 적혀있다. 나는 약 30년간 KBO 모 팀의 팬으로 - 언제부터 봤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 퇴근하면 야구중계를 켜놓고 출퇴근길엔 스포츠뉴스를 읽는게 일상이다. 야구가 없는 월요일과 비시즌인 겨울은 뭘 해야할지 모르는 약간의 황망함과 약간의 우울함을 가지고 살아간다.


메이저리그는 아주 잘 알지는 못하지만, 한국인 메이저리거들은 항상 응원하며 뉴스를 챙겨보곤 했다. 몇 년 전 미국여행에서도 야구 경기를 보러가서, 원정팀 볼티모어 소속의 김현수가 안타를 치는 모습에 순간 환호하다 따가운 눈총을 받기도 했다. 그러니 미국에 오면 현역 메이저리거 중 가장 눈부신 활약을 하는 류현진의 경기를 꼭 봐야겠다는 나의 결심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시즌이 끝나면 류현진이 팀을 옮길 가능성이 높다는 예측이 많았고, 내가 미국에 도착한 7월은 이미 시즌이 반 이상 지난 후였기에 내 마음은 더욱 급했다. 동기들을 처음 만난 날부터 "야구 보러가실 생각 없으세요?"라는 말을 꺼냈다. 우리는 류현진이 다음 선발로 출전하는 경기를 보러가기로 약속했는데, 하필 첫 번째 과제 제출일이 그날 자정이었다. 첫 과제에 부담을 많이 느낀 동기들은 다음 경기도 있지 않냐며 내키지 않아했고, 약속은 흐지부지되었다.


경기 당일 오전에 눈을 떠 나도 모르게 티켓판매 앱인 stubhub을 열었다. $10 짜리 티켓 딱 1장이 올라와있는 것이 보였다. (미국 기준으로는 최최저가다) 과제는 아직 완성이 안되었지만, 낮 경기니까 끝나고 와서 어떻게든 마무리할 수 있지 않을까? 잠이 깨기도 전에 어느새 나는 티켓을 사고, 차 키를 들고 집을 나서고 있었다. 마침 운전면허를 딴 지도 얼마 안되어 자신감이 충만할 때였다.


Ryu와 등번호가 새겨진 티셔츠, 모자를 사서 입고, 맥주와 핫도그를 사들고 자리를 찾아왔더니 그 블럭이 통째로 텅 비어있었다. 정수리가 타들어갈 수준의 햇살이 정통으로 내리쬐는 자리여서 그 누구도 앉아있을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이다. 마침 화장실에서 아끼던 선글라스까지 잃어버린 터라 저 자리에 용감히 앉을 기백은 없고, 주변을 둘러보니 좌석 뒤 스탠드에 기대 서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일단 나도 그들 사이에 자리를 잡아 보았는데, 시야가 가려지지 않아 생각보다 경기보기도 좋고 완전히 그늘이라 쾌적했다. 맥주는 한국 경기장의 카X와 달리 정말 맛있고, 게다가 류현진 선수는 그 어느날 보다 호투를 펼치고 있다! 완벽한 오후를 만끽하는 데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친구들은 어쩌고 혼자 경기를 보러왔니?"


50대쯤 되어보이는 편안한 외모의 백인 아저씨가 역시 맥주를 들고 웃고 있었다. 한국에서 저 정도 아저씨가 저런 말을 했으면 '아 뭔상관..' 하고 도망갔을텐데, 어쩐지 나는 '친구들이 다 과제한다고 바쁜데, 난 이 경기를 포기 못하겠어서 왔어'라고 대답했다. 그는 '너는 야구를 정말 좋아하는구나!'하고 반가워했다. Bill이라는 이름의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경기를 보러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과격한 샌프란시스코 팬들에게 질려서 어릴때부터 다저스 팬으로 살았다고 한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그는 현대차를 좋아해서 두 대나 있다며 차키를 보여주었다. 그는 Ryu의 놀라운 피칭에 감탄하며 한국에서는 어땠는지 궁금해했고, 나는 그의 압도적인 성적과 대조적으로 약한 그의 팀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화 팬들 죄송) 그는 박찬호도 기억하고 있는 오랜 팬이었다! 오늘 만난 미국 아저씨랑 박찬호에 대해 수다를 떨게 될 줄이야.


류현진의 호투와 다저스의 공격력으로 점수차가 크게 벌어져, 나는 류현진이 7회 정도까지 던지고 마운드를 내려오자 집으로 돌아왔다. Bill과 함께 경기를 보러 온 10대 딸과도 인사를 나누고 경기장을 빠져나오는데 괜히 웃음이 났다. "아, 오길 잘했어."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집으로 돌아가면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지만, 그리고 나는 몇 번의 경기를 다른 친구들과 보러 갔지만 그 날만큼 즐거웠던 날은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거의 시즌이 끝나갈 때 즈음, 나와 다른 동기들은 류현진 등판 경기를 보러 갈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틀 전 등판 스케줄이 갑자기 변경되고, 우리가 계획한 다음 날 등판하게 되었다. 그룹의 대부분 사람들은 '미국에 와서 야구 경기 한 번 본다'는 데에 의의를 두는 편이라 스케줄 변경에도 그러려니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류현진 선발 직관 기회를 놓칠수 없었다. 일생 대세를 거르는 일이 없는 나였지만, 이번엔 날짜를 바꾸는게 어떠냐고 주장해보았고, 결국 개인 스케줄에 따라 두 그룹으로 나누어 전날과 다음날에 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 날, 류현진은 메이저리그 데뷔 첫 홈런을 기록했다.


류현진이 메이저리그에서 다시 홈런을 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류현진이 떠난 토론토로 찾아가서 내가 경기를 보는 일도 아마 없을 것 같다. 지금 하고 싶은 일은 지금 해야한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일은 정말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