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식 자기소개에 익숙해지기
입학 첫 날은 예상대로 멘붕의 연속이었다. 몇 년 만에 학교로 돌아가 학생이 되다니, 긴장이 가득해서인지 아침부터 휴대폰을 길에 떨어뜨려 액정이 박살나고 말았다. 낯선 건물을 헤매며 테이프를 빌려 임시조치를 하고 나왔더니, 어느새 학장님이 환영사를 하고 있었다. 이어진 몇몇 사람들의 환영사 및 안내가 이어졌지만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몇 개 반으로 구분하여 1학년 동안 주요 수업들을 함께 듣도록 했다. 수업뿐 아니라 학교의 공식/비공식 각종 행사도 모두 각 반을 중심으로 운영되므로, 학교 생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한국인 동기들이 꽤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반은 어쩐지 나 혼자만 배정되었다는 것이다. 아침부터 운수가 좋지 않더라니.. 각 반마다 정해진 강의실로 이동하라는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강의실에서 다른 학생들은 벌써 삼삼오오 수다를 시작했지만, 이 상황이 그저 어색한 나는 애꿎은 가방만 정리해댈 뿐이었다.
첫 시간이니 각자 자기소개하는 시간을 가진다고 했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첫날은 자기소개가 국룰인가 보다. 하지만 간단한 자기소개 - 이름, 출신지 등 - 과 함께 '좋아하는 패스트푸드 브랜드' 혹은 '좋아하는 TV프로그램'을 이야기하라고 했다. 좋아하는 패스트푸드 브랜드가 자기소개의 소재라니.. 미국답다 싶었다. 사실 나는 이 시간에 하는 이야기들을 거의 절반이상 알아듣지 못했다. 넓은 강의실에서 크지 않은 목소리로 빠르게 이야기하는 영어를 듣는 것도 힘들 뿐더러, 모르는 브랜드와 TV프로그램이 많았기 때문이다. 계속 'Chipotle' (멕시칸) 인줄 알고 들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Chick-fil-A' (치킨샌드위치) 였으니.. 내용이 이해 될리가 없다. 가장 많은 학생들이 언급한 프로그램은 'Bachelorette' 이었는데, 호기심에 찾아봤다가 10분도 보지 못하고 끄고 말았다. 한국의 '하트시그널' 같은 짝짓기 프로그램들은 정말 세련된 거구나를 느낄수 있다. (팬분들 계시다면 죄송)
다음은 Learning team 멤버끼리 모여 자기소개를 하고 'Fun fact'를 공유한 다음, 이를 이용한 작은 게임을 한다고 했다. Learning team은 학교에서 5-6명의 학생을 각각 소규모 팀으로 구성한 것인데, 필수과목 수업의 팀플을 비롯한 여러 활동들을 함께 하도록 했다. 배정된 학생들과 강의실 한켠에 모여 앉아 간단한 소개를 다시 나누었다. 중국계 미국인 2명, 백인 미국인 2명, 인도인 1명과 나로 구성된 팀이다. 그런데 'Fun fact'라니? 난 어리둥절했지만 알고보니 미국에선 거의 자기소개의 클래식 급이었다. 내가 우물쭈물 하는 사이 다른 팀원들은 하나씩 자기 이야기를 꺼냈다. '7개의 악기를 다룰 줄 암' 부터 시작해서 '아역배우로 출연한 경험이 있음', '출간한 책이 있음' 등 다들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나를 좌절시켰던 수많은 resume들이 떠오르며 다시 머리가 하얘졌다. 아마 '출산한지 4개월 되었음' 을 말했다면 'Fun fact'의 취지에도 적합하고 엄청난 관심을 받았겠지만, 그 당시의 나는 그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할 감정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고민끝에 '20년 전 이 학교에 관광객으로 온 적이 있다'고 했는데, 누가 들어도 'Fun fact'는 아닌것 같아 말을 하고 있는 순간에 이미 속상했다.
잊고 싶은 'Fun fact' 공격은 며칠 지나지 않아 또 찾아왔다. 이번엔 심지어 반 아이들 전체에게 이야기해야 했다. 다행인건 전날에 'Fun fact' 공격이 있으리라는 것을 미리 알려주었다는 점이었다. 전날 밤 침대에 뜬눈으로 누워 '왜 나는 아역배우 한 번 못해봤단 말인가?' (어린시절 사진을 보자) 같은 쓸모없는 생각을 하다 지난 삶의 추억들을 되짚어보고,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후보를 몇 개 정한 뒤에 잠이 들었다. 다음날 내가 택한 이야기는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섬에 여행갔던 에피소드'였다. 나는 뭐라도 얘기하자는 식이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열광적인 반응에 깜짝 놀랐다. 미국인의 흔한 리액션이겠거니 했지만, 그날 일정이 끝난 후 많은 아이들이 다가와 '그 얘기 너무 재미있었다.', '그 섬에 나도 가보고 싶었는데 어땠냐'는 등 수없이 말을 걸어주었다. 다른 반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우리 반 아이들이 '그 이야기 좀 해봐, 너의 Fun fact!'와 같이 끄집어 내기도 했다.
그 후로 몇 번 더 'Fun fact' 위기를 경험하고 보니, 'Fun'하거나 나의 아주 특별한 점을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낯선 사람들끼리 쉽게 Small talk을 시작할 수 있는 재료를 쥐어주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우리 반 학생들이 나에게 먼저 말을 쉽게 걸어올 수 있었을까? "어디서 왔니?" "한국" "오, 나 한국음식 좋아해!" 정도가 최선 아니었을까. 그날 이후엔 'Fun fact' 시간을 즐기고 더 잘 들을 수 있었다.
얼마전 들었던 커뮤니케이션 수업의 레슨 중 하나는 '언제 어디서든 꺼낼 수 있는 이야기 하나를 가지고 있어라'는 것이었다. 당신의 'Fun fact'는 무엇일지 생각해보면 어떨까? 우리나라에서 대뜸 이런 질문을 받는 일은 흔치 않겠지만, 어떤 위기상황에든 꺼낼 수 있는 좋은 무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