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사람과 친구가 되는 법
미국에 도착한지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쓰레기통이나 옷걸이 같은 자잘한 생활용품을 구입하러 집 근처 Marshalls에 들렀다. Ross와 비슷한 할인점이지만 좀 더 퀄리티가 괜찮고 매장도 정돈되어 있어 자주 이용했다. 한적한 매장을 휘적휘적 둘러보며 장바구니를 채우고 있는데 문득 뒤에서 나에게 말을 거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네 원피스 참 예쁘다. 어디서 샀니?" (물론 영어로 물어봤다.)
사실 미국 사람들은 낯선 이들끼리 쉽게 말을 걸고, 원래 친한 사람들처럼 시끌시끌 길게 수다를 떠는 일들이 아주 흔하다. 이렇게 지나가다가 맘에 드는 옷이나 악세서리를 칭찬하고, 어디서 샀는지 물어보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이 곳에 도착한지 1주일도 안된 나, 길에서 누가 말을 걸면 '도를 아십니까' 일까봐 이어폰을 눌러 끼고 허둥지둥 도망가는 보통의 한국인인 나는 이 상황이 꽤나 당황스러웠다.
뒤를 돌아보니 대략 내 또래쯤 되어보이는 아담하고 안경을 낀 여자가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아.. 일단 이상한 사람 같지는 않은데. 참고로 내가 입고 있던 원피스는 국내 SPA 브랜드인 에잇세컨즈에서 산 수수한 베이지색 롱원피스였다.
"아, 고마워. 이건 내 고국에서 산 거라 여기서는 살 수 없을거야."
"아 그래? 너의 고국은 어딘데?"
"한국이야."
그녀는 계속 반가운 표정으로 언제 왔는지, 무슨 일로 왔는지 등 질문을 던졌고, 여전히 어정쩡한 표정의 나는 질문에 겨우겨우 대답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목욕용품 걸이대 앞에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녀는 이제 가야겠다며, 전화번호를 교환하자고 했다. 이 근처에서 일하지만 집은 50분쯤 걸리는 먼 곳에 있어서 근처에 친구가 없다고, 우리 친구하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본래 의심많은 성격이지만, 아직 잘 외우지 못하는 내 미국번호를 더듬더듬 알려주었다. 그녀는 자기 번호도 알려주면서 자기 이름은 '알리'라고 철자도 불러주고는 그 곳을 떠났다.
어리둥절하며 장 본 물건들을 들고 집에 돌아온 나는, 그 아이도 막상 대화를 마무리하기 어려워서 그런 말을 한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날 진짜 문자가 도착했다. 근처 커피숍에서 다음주에 만나면 어떠냐는 것이다. 문자를 보며 가만히 여러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나보다 작고 마른 친구라 완력으로 당할거 같지는 않다. 약속장소인 커피숍은 나도 가본 곳으로 늘 사람이 많고 오픈된 구조이다. 정말 현지인 친구가 된다면 아직 완벽하지 않은 내 영어실력에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 하고 답장을 보내 약속을 잡았다.
며칠 후 그 커피숍에 앉아 나는 또 온갖 걱정에 잠겨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과의 만남, 게다가 한국어도 아니고 영어로 그냥 앉아서 수다를 떤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이상한 일에 엮이는 건 아니겠지? 그냥 돌아갈까? 마침 약속시간이 5분쯤 지나서 거의 나갈까하는 마음을 먹은 무렵, 알리가 도착했다. 근처 주차장이 다 차서 좀 멀리까지 대느라 늦었다며.
알리는 30대 초반으로, 금융에 대해 잘 모르고 영어보다 스페인어가 능한 사람들을 위해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자기 일에 대해 너무 열정적이고 사명감을 가지고 있어서, 이 이야기를 할 때 순간 "뭐지, 나한테 보험 영업이라도 하려는 건가?" 하는 의심이 또 스쳤지만, 다행히(?) 난 스페인어를 거의 하지 못한다. 처음엔 대화가 조금 어색했지만 연애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조금씩 활력을 찾았다. 그녀는 한국인 남자친구 - 미국에서 태어나 한국말을 잘 못하는 교포 - 와 진지하게 만나는 중이라고 하면서, 친구들이 한창 결혼을 많이 해서 결혼에 대한 고민이 많다고 했다. 물꼬를 트고 나니 연애와 결혼, 쇼핑과 맛집 등 한국에서 여자친구들과 하는 대화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내 말은 다소 서툴기에 알리가 주로 대화를 리드하기는 했지만. 긴장했던 것보다 즐거웠고, 미국생활에 대한 자신감도 조금 생겼다.
그리고도 우리는 몇 번 만났다. 알리는 출장이 잦은 편이라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커피숍에서 짧게 만나기도 하고, 알리 회사의 파티에도 초대받고, 한국음식점과 알리의 최애 디저트집에도 가봤다. 그 동안에 알리는 한국인 남친과 해변 근처에서 같이 살게 되었고, 크고 귀여운 강아지도 한 마리 입양했다. 그녀의 집에도 한 번 방문하기로 했는데 갑작스러운 팬데믹으로 내가 귀국하는 바람에 그 초대는 아직 실현되지 못했다.
미국에 머물면서 DMV 대기 선에서 기다리는 사람, 커피를 건네주는 종업원,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사람, 옆 자리 선베드에 누워있는 사람 등 다양한 낯선 이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알리처럼 다음 인연으로 이어진 적은 없었지만, 모든 대화가 유쾌했고 이방인 입장에서는 모르던 정보와 세계를 알게 해주었다. 그때의 영향인지, 지하철에서 혹은 길거리에서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옷을 입은 사람, 내가 좋아하는 책을 든 사람을 만나면 가끔 말을 걸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곤 한다. 한국에서 그랬다간 십중팔구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해 피하거나 오지랖 넓은 아줌마 취급을 받게 될 테니 한 번도 실행해 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나를 스쳐가는 이 사람들 중에서 정말 좋은 친구가 될 사람도 있을텐데. 아쉽지만 지나가는 사람을 한 번 다시 돌아보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