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도착한 첫 날, 세 번의 이사

서비스의 효율성과 담당자의 정 사이

by 아마로네

7월의 어느 날, 미국 땅에 발을 디뎠다. 짐이 많지 않아 택배로 보내지 않고 이민가방 2개와 캐리어에 짐을 꽉꽉 실어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내가 살게 된 곳은 학교 근처의 1인실 기숙사 중 하나였다. 사무실에서 서류를 작성하고 키를 받고, 짐들과 함께 낑낑대며 내 방을 찾아가는데 관리인이라는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그는 내 짐을 옮기는 걸 도와주며 내 방 문을 함께 열고 들어갔는데, 바로 아 여긴 안되는데, 라고 말했다. 전 사용자가 나간 후 정비가 안된 방이라는 것이다. 내가 봤을 때는 어차피 낡은 건물이라 샤워커튼이 조금 깨끗하지 못한 것을 제외하면 별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시작했고 나는 어정쩡하게 이민가방을 잡고 서서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내 방에 대한 내용 20%, 수다 80%인 듯한 통화를 마치더니, 그는 사무실에서 다른 방을 배정해 줄테니 그 전에 오늘 하루는 임시 방에 머무르라고 했다. 여기까지 오는 데도 이미 지쳤지만 관리인이 그렇게 말하는데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르게 생각해보니 저 관리인을 우연히 만나지 못했으면 나는 정비 안 된 방을 그냥 쓰게될 운명이었다는 것인가? 그것도 참 찝찝하고 황당했다.


임시 방은 다른 건물에 있었는데, 문제는 그 건물이 언덕 위에 있었다는 것이다. 더운 날씨에 이민가방을 밀고 끌고 거기까지 올라가려니 꽤나 고역이었다. 그 방은 2층 침대가 두 개 놓인 다인실이었는데, 벌써 나처럼 갈 곳을 잃은 학생 한 명이 짐을 풀고 있었다. 나는 오늘 처리할 일이 많았기에 짐만 한 쪽 구석에 두고, 사무실에 연락처 등을 남긴 후 밥을 먹으러 나갔다. 새 방을 배정하려면 하루 이틀 걸린다고 했는데, 밥을 먹고 휴대폰을 개통하러 간 사이 전화가 왔다. 방이 배정되었으니 사무실에 들러 새 방 키를 받아가라는 것이다. 새 방은 첫 번째 건물 옆에 있었기에 다시 짐들과 함께 언덕을 내려와 진짜 내 방에 도착했다. 사실 또 옮기라고 할까봐 첫날은 짐을 거의 풀지 못했다.


고난은 끝이 아니었다. 거주자별로 지정해서 이용하는 주차장을 받으러 다시 사무실에 들렀더니, 신학기라 업무가 많아서 3-4일 걸릴 것 같다고 한다. 거주자 정보와 차량 정보를 매칭하고, 빈 주차장 자리를 배정하는 게 한국이라면 10분이면 끝날 일 아닌가? 의문스럽지만 그 동안에 이용할 주차장을 문의했다. 5분 거리에 주차빌딩이 있다며 추천해 주었는데, 비용이 하루에 13달러 정도일 뿐더러 매일 7시에 데일리 이용권이 만료되어 아침마다 갱신을 해야하는 지독한 곳이었다. 결과적으로 주차장 배정은 3일이 아니라 2주 이상 걸렸다. 그것도 메일로 수없이 문의하고 주차비용 부담이 크다고 호소한 덕분에 그 정도 걸린 것이다.


그 날은 내가 운이 별로 좋지 않은 날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일들은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부지기수로 일어났다. 요청한 일이 처리되지 않고, 처리하려고 하면 무한정 대기해야 하고, 담당자에게 문의하면 엉뚱한 답변을 해서 며칠을 허비했다가 다른 담당자에게 문의했더니 전혀 다른 답변을 얻은 적도 많다. 효율적이고 빠른 한국 서비스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도통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혹시 오해할까 덧붙이면, 이방인이라 겪는 인종차별적인 대우가 아니라 현지인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일상이다. 특히 비효율적이기로 유명한 DMV(운전면허관리국)의 대기시간 문제는 농담의 단골 소재이다.


어찌보면 주먹구구식 행정과 서비스지만, 조금 익숙해지고 나니 좋은 점도 있었다. 전산화, 규격화보다는 아날로그적인 문제해결이 많다보니, 담당자의 재량으로 편의를 봐주거나 유연성을 발휘해 주는 경우도 생각보다 많다. 과거에는 한국이 '정'의 문화라고 했지만, 미국에서 오히려 인간적인 소통이 많은 득이 되었다. 초반에 내가 휴대폰 때문에 다소 곤란을 겪고 있을 때 현지인 친구들이 "한 번 전화해서 사정 얘기해봐"라고 해서 그게 되겠어? 하고 의심했는데, 구구절절 말하다 보니 어려운 일들이 (시간은 좀 걸리지만) 거의 항상 해결되었다.


미국도 최근에는 공공서비스를 비롯해 많은 업무들이 전산화되고 효율화되고 있다. DMV도 사전 예약을 하거나 홈페이지에서 많은 업무를 처리할 수 있고, 다른 업체들도 비슷한 추세를 따르고 있다. 분명히 일상생활이 편리해지고 화날 일이 줄어들 것은 분명하지만, 내 상황에 대해 길고 따뜻한 위로의 답장을 보냈던 몇몇 담당자들의 마음이 가끔 생각나기도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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