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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감한 망고 Apr 12. 2022

아직도 아프시다 들었습니다만

한국 촌놈의 인도 상륙 23일차(2022.03.29)

난생처음 호된 물갈이를 치렀다. 3월 내내  밥 한 끼 맘 편히 못 먹고 하루 두 끼 허연 죽으로 연명했다. 가뜩이나 마른 몸이 더욱 앙상해져 갈비뼈 사이사이 골짜기가 선명해진다고 느낄 때쯤 기적이 일어났다. 무려 21일 만에 설사가 멈춘 것이다. 밥을 먹을 때마다 콕콕 쑤시는 아픔은 미세하게 남아있었지만 일단 설사가 멈췄다는 것만으로 넙죽 절이라도 올리고 싶었다.


인도 상륙 사흘 째 되던 날, 묽은 변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배는 아프지 않았고 이 정도쯤이야 컨디션이 안 좋을 때 몇 번이고 겪었던 증상이기에 별 의심 없이 넘어갔다. 하루, 이틀, 아무 고통 없이 그렇게 설사만 하다가 조용히 넘어가는 게 나만의 물갈이인가 보다 했으나 그건 이방인의 오만한 착각이었다. 이레 째 되는 날 저녁 9시부터 온몸이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했다. 뒷골은 띵띵 울리며 당겨오지 팔과 허벅지는 두드려 맞은 것처럼 천근만근이지 다시 생각해도 끔찍한 전쟁의 서막이었다.

장염 약과 함께 먹으라고 파는 현지 유산균.

귓속에 체온계를 넣어보니 38.7도. 한국에서 신줏단지처럼 모셔온 타이레놀을 급히 찾아 겨우겨우 두 알을 삼켰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끙끙 앓으며 새벽까지 뜬 눈으로 지새우고 아침 동이 틀 무렵에야 간신히 잠에 들었다. 약 기운이 돌기 시작하면 대여섯 시간은 열이 내리는 듯싶다가도 이내 귀신같이 체온이 올라가기를 수 차례 반복, 그렇게 지옥 같은 이틀을 보냈다. 창문만 열어도 40도 삼복더위가 밀려오는 마당에 더운 줄도 모르고 밍크 수면잠옷을 입은 채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며칠 뒤 다행히 열감은 잡았지만 끈질긴 복통과 설사는 해결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챙겨 온 장염 약도 먹어보고 인도에서 유명하다는 약국약과 유산균도 먹어봤지만 그 어느 것도 신통한 해답을 주진 못했다. 증상이 2주를 넘어갈 무렵에는 사람이 거의 반쯤 미쳐갔다. 생수만 먹어도 배가 아파 매번 전기포트에 물을 끓여 식혀 마셨고 멀건 쌀죽에 멸치나 땅콩조림 한 두 숟갈 먹었는데도 그저 뱃속에 음식만 들어갔다 하면 꾸룩꾸룩 아파오니 밥숟갈 뜨는 게 두려울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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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아프시다 들었습니다만 괜찮으신가요? 한참 전에 몸이 안 좋다고 들었다며 위로 문자를 보내줬던 W가 몇 주가 지난 지금까지도 아프다는 말을 다시 전해 듣고는 안부를 물어왔다.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기력을 회복하지 못한 것에 꽤 놀란 듯 보였다. '아직도'라는 그의 말이 이 상황을 가장 완벽하게 정리해 준다는 생각이 들어 한참을 없이 웃었다. 이 사람 지금 인도에 온 지가 언젠데 여전히 설사를 하고 있다니까 다들 혀를 내두를 수밖에.


이쯤 되면 정말 내과라도 가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혹시 장염이 아니라 다른 병은 아닐까. 백신을 맞긴 했지만 장티푸스나 콜레라는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설마 한국 뜨기 직전에 코로나라도 걸려온 건 아닐까 자가진단키트로 검사까지 해봤으나 결국은 장염이라는 결론뿐이었다. 천만다행으로 통증은 조금씩 줄어들었고 시도 때도 없이 아프던 것이 일정한 시간대로 좁혀지더니 마침내는 밥을 먹은 직후에만 콕콕 쑤시다가 변을 보면 괜찮아지는 상태가 되었다.

장염이라는 병의 특성상 나쁜 균이 밖으로 배출되면 자연스럽게 회복되는 게 수순인 걸 알고 있었지만 멈추지 않는 설사에 무섭기도 참 많이 무서웠다. 이러다 사는 내내 아프면 어떡하나, 내가 인도와 맞지 않아서 그런 걸까, 이래 가지고 제대로 인도를 즐길 수는 있을까 오만 가지 걱정이 다 들었다. 다만 여기서 무너질 수 없다는 오기만큼은 끝내 버릴 수 없었다. 남들은 현지 약 먹고 이틀이면 멀쩡진다는데 나라고 천년만년 아프겠어? 아무리 골골대도 나 아직 20대라 이거야. 이제 이판사판이야.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끝까지 가보자고. 나를 믿고, 내 치유력을 믿고,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로 했다.


한 달이든 두 달이든 통증이 멈출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리겠다고 마음먹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기적처럼 설사가 멈췄다. 이 정도면 충분히 괴롭혔다고 생각한 건지 정말 말도 안 되는 타이밍에 뜬금없이 멀쩡해져 어안이 벙벙했다. 고약한 마법사의 주술에 걸린 것처럼 시름시름 시들어가다 느닷없이 저주가 풀려 생기를 되찾은 기분이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이만하면 나름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 드디어 내 몸도 인도 친화적으로 세팅이 된 걸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은 물갈이, 그리고 가장 오래도록 아팠던 장염. 혹독한 신고식을 치르고 당당히 로컬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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