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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감한 망고 Apr 13. 2022

인도 사람들 영어 잘하지 않아?

한국 촌놈의 인도 상륙 27일차(2022. 04. 02)

인도 사람들 영어 잘하지 않아? 너한테 완전 천국일 것 같은데. 출국을 2주 앞둔 토요일, 광화문 교보빌딩 근처 일식집에서 15년 지기 B를 만났다. 인도로 가게 된 소감이 어떤지 어서 말을 해봐라 기대감에 반짝이는 그의 눈빛에 호응하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다 화제가 영어로 넘어갔다. 그렇잖아도 제일 기대하고 있는 부분이 영어권 국가에 가게  거라고 마냥 신이 나서 떠들었다. 인도 친구들과 영어로 소통하면 얼마나 신날까. 생각만으로도 콩닥거리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며 핑크빛 상상 속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에티하드 비행기를 타고 델리에 입국하던 날까지만 해도 나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부다비 공항에서 어느 인도 아저씨가 흘린 펜을 주워드릴 때만 해도, 착륙 후 입국심사에서 여권을 건네주고 돌려받을 때만 해도, 숙소 경비아저씨와 인사를 나눌 때만 해도 역시 해외에 살려면 영어는 잘하고 볼 일이다 으쓱했다. 제 아무리 인도 영어가 이상하다 소문났어도 결국 실력 있는 사람은 인도가 아니라 인도 할애비 영어를 들어도 이해할 수 있지 않냐 자신만만이었다.


머리털을 쥐어뜯어도 해결이 안 되는 마음의 고통은 며칠 뒤부터 시작됐다. 영어가 안 들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도 영어가 안 들렸다. 부동산 중개인과 집을 보러 가면 집주인이 하는 말이 안 들리고, 백화점에 가면 젤라또 직원이 하는 말이 안 들리고, 인디아 투데이를 보면 앵커의 말이 안 들렸다. 열 문장 중 두 단어가 안 들리는 귀여운 수준이 아니라 두 단어 빼고 열 문장이 안 들리는 끔찍한 처지가 됐다. 혹시 이게 꿈은 아닐까 허벅지를 꼬집어서 깨어날 수만 있다면 시뻘게질 때까지 꼬집고 싶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못 알아먹을 수가 있을까. 나의 수십 년 영어 인생을 송두리째 데굴데굴 골로 보내버리는 이 나라. 어메이징 인디아.

한국에 콩글리시(Konglish)가 있다면 인도에는 인글리시(Inglish)가 있다. 수많은 언어와 민족이 인도라는 지붕 아래 한 나라를 이룬 이 땅에서 서로의 소통을 도와주는 수단이 영어다. 인도 사람들에게 영어는 모국어가 아니라 배워야 하는 제2언어일뿐이다. 자연스럽게 자기들만의 발음 습관이 생기고 원래의 뜻과 다르게 사용되는 표현이 나오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을 내가 어찌 탓하겠는가. 그들의 매력 넘치는 발음을 찰떡같이 알아듣지 못하는 내 두 귀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인도 영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식/ 영국식/ 호주식 영어 발음과 매우 다르다. 현지어의 발음 체계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자음을 발음한다. 특히 T, D, R은 그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현란한 발음이었다. 물론 오르락 내리락 롤러코스터 억양도 빼놓을 수 없다. 말의 속도는 또 어찌나 빠른지 우다다다 휘몰아치는 것이 주특기다. 마치 띄어쓰기 없는 한국어를 속사포처럼 뱉어내는 식으로 영어를 한다. 계층이나 직업에 따라서도 차이가 크다. 고등교육기관을 나오고 유학을 다녀온 사회 지식인층이 구사하는 영어는 그나마 잘 들리지만 일반적인 서민들이 사용하는 영어는 문법과 어휘가 깨진 경우가 다반사라 더욱 소통이 어렵다.

몇몇 친구들과 이 사태에 대해 토의한 끝에 인도 영어는 갑 오브 갑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수년째 미국에서 공부하는 D는 인도 교수님 수업은 아직까지도 100% 알아듣지 못한다며 한탄했고, 호주 원어민 A는 인도에 와서 인도 영어를 새로운 '언어'로서 배워야 했다고 실토했다. 한국에서 인도인들과 줌 미팅을 한다는 C는 회의할 때마다 책상을 집어던지고 싶다는 솔직한 심정까지 털어놨다. 나만 겪는 좌절감이 아니라는 사실에 소소한 위로를 받으며 용기를 내기로 했다. 어쨌든 인도에 왔으니 인도 영어에 익숙해지는 것만이 유일한 해답이었다. 일단 뭐가 들려야 일을 하든 친구를 사귀든 할 것 아닌가 싶어 죽기 살기로 부딪치기로 했다.


그날부터 나는 매일 세 시간씩 인도 영어를 공부하고 있다. 인도 뉴스를 듣고, 인도 대학생들이 길거리에서 인터뷰한 영상을 찾아보고, 인도 출신 유명인의 영어 강연을 몇 번이고 돌려봤다. 뭄바이와 첸나이, 델리와 뱅갈 사람들의 영어 발음이 어떻게 다른지까지 검색하며 안 되면 되게 하라 식으로 맹렬하게 연습한다. 그러기를 한 달, 그들의 신기하고도 놀라운 억양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다시 만난 부동산 중개인의 설명을 절반 이상 알아먹고 깐깐하게 질문할 수 있는 짬이 생겼다.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외국인을 우롱하는 노점상과 썰전을 펼쳐 삼분의 일 가격으로 깎는 배짱도 덤으로 얻었다.


밤낮없이 인도 영상을 틀어 놨더니 그새 정이라도 들었는지 이제는 이 사람들 말이 제법 귀엽게 들린다. 혀를 쭉 뽑아 스트레칭 시켜주고 싶었던 얄미운 발음을 어느새 내가 따라 하고 있다. 인도가 나를 홀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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