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동네에서 델리로 가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자동차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거나. 물론 버스를 타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어리바리 이방인이 감히 고를 수 없는 선택지다. 차는 서너 번 타봤으니 이제 지하철을 시도할 차례였다. 마침 몇 주째 옆 방에 머물고 있는 한국에서 출장 온 또래 청년이 델리 메트로가 생각보다 괜찮다며 적극 추천하길래 용기 내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숙소에서 가까운 구루 드로나차랴(Guru Dronacharya)역까지 릭샤를 타고 이동했다. 한 15분 정도 달렸을까 저 멀리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푸른 역사가 등장했다. 온 벽을 쨍한 파란색으로 칠한 모습마저 참 인도답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지폐를 꺼내 70루피를 지불하고 릭샤에서 내려 역으로 들어섰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영락없는 당산역 2번 출구였다. 생각보다 깨끗하고 쾌적한 시설에 적잖이 놀랐지만 티를 내는 순간 아주 조금은 인도를 무시했던 마음을 들킬 것만 같아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힌디어와 영어가 병기된 지도와 간판 덕분에 헤매는 일도 없었다. 영어를 읽을 줄 안다면 누구라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티켓 발권기를 찾아 100루피 지폐를 투입하고 일회용 토큰 2개를 구입했다. 지하철 1회 요금은 50루피, 약 800원이다. 플라스틱 동전처럼 생긴 토큰이 현기증 날 정도로 앙증맞아 한참을 들여다봤다. 행여나 떨어뜨릴까 싶어 손에 꽉 쥐고 검표기로 향했다. 표를 구매하고 승강장으로 이동하는 방식은 한국과 거의 동일하다. 토큰의 전자 마그네틱을 검표기에 인식시킨 후 도깨비방망이처럼 생긴 막대를 밀면서통과하면 된다.
물론 차이점도 있다. 인도에서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는 반드시 금속탐지기를 통과하고 소지품을 검사받아야 한다. 그 모습이 마치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는 것과 같아 여기가 무슨 델리 공항이라도 되는가 착각이 들었다. 대단한 검사는 아니었지만 누런 베이지색 제복을 입은 직원이 여기저기 서서 부리부리한 눈으로 쳐다보는데 괜히 심장이 콩닥거렸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 타이밍에 쫄긴 왜 쪼냐 당당하게 지나갔다.
한 층 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이번에도 영락없는 당산역 승강장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한가로운 풍경과 노란 점자판이 가로지르는 회색 돌바닥.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차가 들어온다. 설레는 마음으로 몸을 실었다. 주말 오후 1시 반인데도 드문드문 빈자리가 보이는 걸 보니 오늘은 한산한 날이 되려나 보다. 서울 2호선보다 여유로운 모습에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넉넉한 좌석 길이와 정갈한 손잡이, 깨끗한 노선도와 이번 역을 알려주는 전광판, 누가 봐도 세련된 신상 지하철이었다. 빈자리 중 하나를 골라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생전 지하철 처음 타는 촌뜨기처럼 이리 두리번 저리 두리번 실내를 구경했다.
창밖 풍경은 어떨까 뒤를 돌아보니 건물도 나왔다가 풀숲도 나왔다가 다채롭기 그지없다. 확실히 델리에 오면 초록색이 많이 보여 마음이 평화롭다. 나무와 풀꽃이 무성하고 새와 다람쥐가 노래하고 원숭이와 소가 길거리를 배회하는 곳, 델리. 그 모습이 낭만적으로 보이는 건 내가 아직 당해보지 않아서라나. 인도에 머무는 동안 한결같이 촉촉한 감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며 한 시간을 이동했다.
지하철 타고 다니긴 좀 그렇잖아요. 델리에 나갈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나의 말에 G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던 일이 떠올랐다. 인도에 온 지 나흘 째 되던 날이었다. 혼자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 반을 이동하기에는 너무 멀고 불편하지 않겠냐는 말에 잔뜩 겁을 먹었다. 인도에 20년을 살았다는 베테랑의 말을 흘려들을 수는 없었다. 그날부터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 편견이 생겼다. 인도 지하철은 하드 코어니까 함부로 타면 혼쭐나겠구나, 아무래도 혼자 타긴 어렵겠다 단정 지었던 그 마음이 몹시 미안해졌다. 그런 생각을 품는 것조차 어리석게 느껴질 만큼 상상 이상으로 쾌적한 지하철이었다.
물론 주중 출퇴근 시간에는 지옥철이 따로 없다는 말도 들었다. 허나 이 말도 내가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는 함부로 재단하고 싶지 않아졌다. 인도 땅에 있는 그 어느 것도 스스로 겪어 보기 전까지 감히 판단하기 않기로 결심했다. 내가 타고 다녔던 아침 8시 9호선 급행열차가 더 지옥이었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남의 말만 듣고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평가하는 건 이만하면 됐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같은 지하철을 두고도 사람마다 평가가 달라진다. 누군가에게는 복잡하고 냄새나는 불편함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만족스럽고 쾌적한 편안함이다. 어느 것에도 정답은 없다. 각자가 살아온 삶이 다른 만큼 세상을 평가하는 기준이 다를 뿐이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귀담아듣되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 법을 배우고 있다. 나는 그 누구의 말에도 치우치지 않는 나만의 인도를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