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관광지는 델리에 위치한 하우즈 카스 포트(Hauz Khas Fort)였다. 애초에 작정하고 온 건 아니었다. 하우즈 카스 빌리지에 힙한 펍과 가게가 많아 현지 젊은이들이 놀러 간다길래 그 구경을 하러 갔다가 얻어걸린 유적지였다.
델리판 홍대라고 기대를 잔뜩하고 갔는데메인 골목을 따라 걷다 보니 얼마 못 가 뜬금없이 매표소가 나왔다. B도 나도역사유적지를 굉장히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삿짐이 도착할 때까지는 아껴두고 싶었건만 여기서 이렇게 스타트를 끊어도 되는 걸까. 한 달째 같은 옷을 거적데기처럼 두른 꾀죄죄한 모습에다 사전조사도 안 한 상태에서 감히 유적지에 손을 대는 게 좋은 선택일지 잠시 고민했지만 일단 여기까지 온 김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표를 사러 줄을서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숫자가 야속하다. 인도인 25루피 vs 외국인 300루피.역시 듣던 대로 무자비한 폭리다. 외국인에게만 수십 배 비싼 입장료를 받아먹는인도 정부의 앙큼한 행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실제로 당하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뜨내기 여행객도 아니고 거주증까지 받은 장기 체류자인데 이 가격을 내야 한다니 억울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소심한 반항이라도 해야겠어서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푸욱쉬고 지갑을 열었다.
기왕 돈도 냈으니 최대한 열심히 둘러보자며의욕을 한가득 들쳐 메고 입장했다. 넓게 펼쳐진 푸른 잔디와 군데군데 허물어진 벽돌 건물을 둘러보며 와 여기가 바로 하우즈 카스 포트구나 사진 한 컷 찰칵 찍는 순간 경비복을 입은 안전요원이 다가온다. 옷 명찰에 적힌 'security'를 보고 내가 뭘 잘못했나, 사진 찍었다고 혼내러 오나, 이런저런 추측을 던져보는데 아아 그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온다.
갑자기 짧은 영어로 일본에서 왔냐고 물어본다. 그러더니 여기가 뭐하는 곳이었는지 설명하기 시작한다. 자기를 따라오라는 듯 고개를 까딱까딱. 처음 당해보는 일이라 일단 순순히 쫓아갔다. 넓은 유적지를 성큼성큼 걸어 다니면서 여기는 뭐고저기는 뭐고 자기 딴에는 열심히 설명을 하는 것 같긴 한데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목구멍으로 먹어 들어가는 웅얼웅얼 인도 발음에다 목소리도 모기처럼 작아서 이게 뭐하는 짓인지 회의감이 들 때 즈음 B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지금까지는 그가 무안해할까 봐 억지로 웃어주며오호 그렇구나, 여기가 그런 곳이구나, 맞장구를 쳐줬다만 그러다가는 한 바퀴를 몽땅 날치기로 보게 생겼다. 설명 같지도 않은 설명은 이제 그만. 여기서 헤어지고 우리끼리 알아서 보겠다고 말했더니 안전요원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 그 자리에 서서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 떠나지를 않네? 우리는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 돈을 달라는 거였다.
와 얘네 진짜 웃기네. 누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접근하더니 돈 안 주니까 안 가는 거봐라? 하도 어이가 없어 한국말로 시원하게 구시렁거리는데 B가 부스럭거리며 지갑을 뒤진다. 하필이면 지폐도 몇 장 없어 결국 20루피짜리 한 장을 주고 끝냈다. 마음 같아서는 이런 같잖은 설명에 단 1루피도 주기 아깝다 생각했지만 이마저도 인도니까 경험할 수 있는 에피소드 아니겠냐며 웃어넘기려 했다. 그의 얼굴 표정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20루피를 건네받은 안전요원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성에 안 차는 금액이었는지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면서 불만 가득한 얼굴로 한동안미적거리더니 인사말도 없이 홱 돌아갔다. 하다 못해 땡큐라도 해줄 줄 알았는데 너무 큰 기대였나 보다. 외국인이라고 돈 많을 줄 알았냐. 우리도 개털이야 이 양반아. 나의 나지막한 읊조림에 B가한참을 끽끽대며 웃었다. 돈 주고도 멋쩍어지는 이 기분, 아주 참신하다.
우여곡절 끝에 야매 가이드를 돌려보내고 우리끼리 호젓하게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으로 이날의 구경은 마무리되었다. 출구로 돌아 나올 때 그 사람 어디 갔는지 찾아보자고 한참을 두리번거렸지만 그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경비복 훔쳐 입은 사기꾼 아니었냐는 그럴듯한 인도 괴담을 만들어내며 숙소로 돌아왔다.
인도 사람들은 돈을 받을 때 굽신거리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돈을 받은 게 아니라 당신이 덕을 쌓을 기회를 줬다고 생각한다는 거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맹랑하고 뻔뻔한 발상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는데 두고두고 생각할수록 참 재밌는 사람들이 아닌가.아무래도 나는 인도를 미워할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