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용감한 망고 Apr 18. 2022

외국인이라고 돈 많을 줄 알았냐

한국 촌놈의 인도 상륙 43일차(2022. 04. 18)

처음으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관광지는 델리에 위치한 하우즈 카스 포트(Hauz Khas Fort)였다. 애초에 작정하고 온 건 아니었다. 하우즈 카스 빌리지에 힙한 펍과 가게가 많아 현지 젊은이들이 놀러 간다길래 그 구경을 하러 갔다가 얻어걸린 유적지였다.


델리판 홍대라고 기대를 잔뜩하고 갔는데 메인 골목을 따라 걷다 보니 얼마 못 가 뜬금없이 매표소가 나왔다. B도 나도 역사유적지를 굉장히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삿짐이 도착할 때까지는 아껴두고 싶었건만 여기서 이렇게 스타트를 끊어도 되는 걸까. 한 달째 같은 옷을 거적데기처럼 두른 꾀죄죄한 모습에다 사전조사도 안 한 상태에서 감히 유적지에 손을 대는 게 좋은 선택일지 잠시 고민했지만 일단 여기까지 온 김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표를 사러 줄을 서자마자 앞에 보이는 숫자야속하다. 인도인 25루피 vs 외국인 300루피. 역시 듣던 대로 무자비한 폭리다. 외국인에게만 수십 비싼 입장료를 받아먹는 인도 정부의 앙큼한 행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실제로 당하는 처음이었다. 나는 뜨내기 여행객도 아니고 거주증까지 받은 장기 체류자인데 가격을 내야 한다니 억울한 마음을 숨길 없었다. 소심한 반항이라도 해야겠어서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푸욱 쉬고 지갑을 열었다.


기왕 돈도 냈으니 최대한 열심히 둘러보자며 의욕을 한가득 들쳐 메고 입장했다. 넓게 펼쳐진 푸른 잔디와 군데군데 허물어진 벽돌 건물을 둘러보며 와 여기가 바로 하우즈 카스 포트구나 사진 한 컷 찰칵 찍는 순간 경비복을 입은 안전요원이 다가온다. 옷 명찰에 적힌 'security'를 보고 내가 뭘 잘못했나, 사진 찍었다고 혼내러 오나, 이런저런 추측을 던져보는데 아아 그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온다.

갑자기 짧은 영어로 일본에서 왔냐고 물어본다. 그러더니 여기가 뭐하는 곳이었는지 설명하기 시작한다. 자기를 따라오라는 듯 고개를 까딱까딱. 처음 당해보는 일이라 일단 순순히 쫓아갔다. 넓은 유적지를 성큼성큼 걸어 다니면서 여기는 뭐고 저기는 뭐고 자기 딴에는 열심히 설명을 하는 것 같긴 한데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목구멍으로 먹어 들어가는 웅얼웅얼 인도 발음에다 목소리도 모기처럼 작아서 이게 뭐하는 짓인지 회의감이 들 때 즈음 B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지금까지는 그가 무안해할까 봐 억지로 웃어주며 오호 그렇구나, 여기가 그런 곳이구나, 맞장구를 쳐줬다만 그러다가는 한 바퀴를 몽땅 날치기로 보게 생겼다. 설명 같지도 않은 설명은 이제 그만. 여기서 헤어지고 우리끼리 알아서 보겠다고 말했더니 안전요원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 그 자리에 서서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 떠나지를 않네? 우리는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 돈을 달라는 거였다.


와 얘네 진짜 웃기네. 누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접근하더니 돈 안 주니까 안 가는 거 봐라? 하도 어이가 없어 한국말로 시원하게 구시렁거리는데 B가 부스럭거리며 지갑을 뒤진다. 하필이면 지폐도 몇 장 없어 결국 20루피짜리 한 장을 주고 끝냈다. 마음 같아서는 이런 같잖은 설명에 단 1루피도 주기 아깝다 생각했지만 이마저도 인도니까 경험할 수 있는 에피소드 아니겠냐며 웃어넘기려 했다. 그의 얼굴 표정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20루피를 건네받은 안전요원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성에 안 차는 금액이었는지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면서 불만 가득한 얼굴로 한동안 미적거리더니 인사말도 없이 홱 돌아갔다. 하다 못해 땡큐라도 해줄 알았는데 너무 기대였나 보다. 외국인이라고 돈 많을 줄 알았냐. 우리도 개털이야 이 양반아. 나의 나지막한 읊조림에 B 한참을 끽끽대며 웃었다. 돈 주고도 멋쩍어지는 이 기분, 아주 참신하다.

우여곡절 끝에 야매 가이드를 돌려보내고 우리끼리 호젓하게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으로 이날의 구경은 마무리되었다. 출구로 돌아 나올 때 그 사람 어디 갔는지 찾아보자고 한참을 두리번거렸지만 그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경비복 훔쳐 입은 사기꾼 아니었냐는 그럴듯한 인도 괴담을 만들어내며 숙소로 돌아왔다.


인도 사람들은 돈을 받을 때 굽신거리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돈을 받은 게 아니라 당신이 덕을 쌓을 기회를 줬다고 생각한다는 거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맹랑하고 뻔뻔한 발상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는데 두고두고 생각할수록 참 재밌는 사람들이 아닌가. 아무래도 나는 인도를 미워할 수 없을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지하철 타고 다니긴 좀 그렇잖아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