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이후 처음 이사를 하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정리하게 된다.
단순히 짐을 줄이고 물건을 재배치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마음의 구석구석까지 들여다보게 되는 시간이 되고 있다.
이번 기회에 오래 묵혀두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꺼내보며
내가 진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무엇을 놓아도 괜찮은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며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쌓아두기만 하고 쓰지 못했던 포인트와 적립금이었다.
휴대폰 속 앱 정리를 하다 우연히 마일리지 앱을 열어보았다.
얼마 전부터 여행이 가고 싶어서 사용 가능한 마일리지를 체크하고 있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냥 사라진 마일리지는 없을까?’
조심스럽게 눌러본 지난 내역엔,
어느새 소멸된 3만 2천 마일이 적혀 있었다.
순간, 마음이 푹 꺼졌다.
처음엔 그저 허무했다.
이어서 속상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이내 짧은 자책을 하게 되었다.
다른 앱도 열어보며 남아 있는 포인트를 확인해 봤다.
작게는 몇백 원에서부터 많게는 몇만 원까지...
모아놓은 줄만 알았던 것들이
결국 쓰지 못하고 사라져 있었다.
모두 합치니 20만 원이 훌쩍 넘었다.
누구에게 항의할 수도 없고,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도 없는 상황.
그냥 ‘내가 잘 챙기지 못해서’ 생긴 손해였다.
포인트며 쿠폰, 마일리지 하나하나 애써 모아두던 나였기에
더 속상했다.
그토록 정성껏 쌓아온 것들이
무심함과 덜렁거림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분명 며칠을 속 부글거리며 스스로를 질책했을 것이다.
“왜 확인 안 했어?”
“무슨 방법이 없을까?” 하며
마음을 마구 흔들고, 상처 내고, 며칠이고 기분이 가라앉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다.
물론 허무하고 아까운 감정은 여전했지만,
그 감정에 오래 끌려가지 않았다.
감정이라는 건,
그렇게 어느 날 문득 얼굴을 들이미는 경우가 있다.
기분 좋을 때만 오는 게 아니다.
속상하고 억울하고, 어이없고 당황스러울 때도
감정은 아주 정직하게 내 안에 찾아온다.
예전엔 그걸 애써 덮었다.
‘별일 아니야.’
‘그깟 거 가지고 왜 이래.’
스스로를 무시하거나, 더 큰 감정으로 눌러버리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감정을 덮기보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자주 가는 한의원이 있는데 몇 년 전부터 원장님께서 마음공부를 권하셨고,
그 계기로 몇 권의 책을 추천해 주셔서 읽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언제부턴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마음의 근육이 자라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감정표현이 솔직한 편이다.
기쁘면 웃고, 화가 나거나 불편하면 얼굴에 바로 티가 나기도 했었다.
가끔은 너무 직설적인 감정 표현에 상대방을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건,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먼저 알아주는 것’이 핵심이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감정이 일어나는지를
내가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그 감정에게 말을 걸어주는 것.
“지금 화났구나.”
“아쉽고 속상하지.”
“이건 충분히 억울한 일이야.”
이렇게 스스로의 감정을 인정해 주면,
그 감정은 내 안을 마구 휘젓지 않고
조용히 내 옆에 앉아 있는 존재가 된다.
이해받은 감정은 더 이상 날 흔들지 않는다.
감정은 몸과도 연결되어 있다.
슬픔은 폐를 움츠리게 하고,
화는 간에 열을 올리며,
두려움은 신장을 약하게 만든다.
실제로 한의학에서도 감정과 장기,
건강은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고 말한다.
감정 공부는 단지 감정을 잘 다루기 위한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곧, 내 건강을 지키고
내 삶을 안정되게 유지하기 위한 나만의 습관이 되었다.
"나를 들여다봐라."라는 말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감정을 알아차리고 챙긴다는 것은 곧, 나를 챙기는 것이다.
그냥 놓치고 흘려보내면,
마일리지처럼, 포인트처럼
사라지고 난 후에는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도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
“지금 마음은 어때?”
“오늘은 어떤 감정이, 머물고 있니?”라고 말을 걸어본다.
감정을 들여다보는 이 조용한 습관이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에서 크게 흔들리지 않기 위한,
내 삶의 가장 단단한 루틴이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