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 전, 마음의 속도를 조절하는 연습)
이번 여행은 예고도, 거창한 계획도 없다.
마음속에서만 수십 번 되뇌다 미뤄두기만 했던
‘떠나야지’라는 다짐이,
이사 후 정리 되지 않은 짐들을 보는 순간 불쑥 고개를 들었다.
오래 눌러두었던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오듯,
“이제는 진짜 가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창고에 밀쳐놨던 상자 하나를 꺼내 들 듯,
나는 가볍게 결정을 내렸다.
결심과 동시에 가장 먼저 찾아온 건 설렘이었다.
이름도 낯선 도시의 공기,
처음 걷게 될 골목길,
그 어딘가에서
지금보다는 조금 더 자유로워진 나를 만날 것 같은 기대...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설렘은 늘 그렇듯 오래 머물러 주지 않는다.
여행 캐리어지퍼를 닫을 즈음,
익숙한 얼굴의 불안이 슬그머니 따라붙었다.
이게 도망은 아닐까,
돌아왔을 때 더 허탈해지지는 않을까,
예산은 괜찮을까,
일정이 나에게 맞는 걸까.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앞당겨 걱정하며,
머릿속에서는 실패 시나리오가 쉼 없이 돌아갔다.
불안은 늘 그렇게 찾아온다.
무언가 좋은 선택을 했을 때조차,
그 기쁨을 끝까지 누리게 두지 않는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불안의 바닥에는 늘 같은 마음이 깔려 있었다.
잘 해내고 싶고, 실수하고 싶지 않고,
이번만큼은 단단히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
어쩌면 이 지긋지긋한 불안은
내가 여전히 내 삶에 진심이라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불안을 대하는 태도를 조금 바꿔보기로 했다.
불안을 밀어내거나 없애려 애쓰기보다,
나의 옆자리에 조용히 앉히는 쪽을 택했다.
“나도 좀 무서운데, 그래도 한번 해볼게.”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을 건네며 숨 한번 깊게 내뱉으면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가 조금씩 내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불안은 나를 멈추게 하는 벽이 아니라,
속도를 조절해 주는 경계석처럼 바라보기 시작했다.
불안할수록 몸을 먼저 움직였다.
생각 속에만 머물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싱크대에 쌓인 컵을 정리하고,
오늘 할 일을 몇 줄 적어보는 것.
이렇게 손끝에서 시작된 작은 움직임들은
흩어졌던 나를 다시 ‘지금-여기’로 불러왔다.
여행지에서도 마찬가지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땐 휴대폰을 내려놓고 온기와 향에 집중하고,
창문을 열면 코끝에 닿는 낯선 곳의 바람의 냄새를 깊게 들이마신다.
완벽한 일정이나 사진보다 중요한 건
이 여정을 통과하는 나의 호흡이라는 것을
여러 번 반복하고 나서야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숨이 깊어질수록 불안은 잦아들었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지만, 더 이상 나를 조이지는 않았다.
아마 이번 여행은
불안한 나와 나란히 걷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 될 것이다.
낯선 길 앞에서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꺼이 떠나는 이유는,
두려움보다 조금 더 큰 용기가 우리 안에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 용기는 생각보다 다정해서,
넘어지면 조용히 일으켜 세우고,
망설이면 “한 걸음만 더”라며 등을 밀어준다.
여행이 끝나고 다시 익숙한 방으로 돌아와도,
이 연습은 계속될 것이다.
매일 같은 공간에서도 설렘을 발견할 수 있도록,
오늘의 나에게 맞는 호흡을 잃지 않도록,
설렘과 불안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려 애썼던 나를
조용히 마주하는 시간으로 남기를,...
그 사이에서 내 안의 단단함이 한 겹 더 쌓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