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리 없이 깊어지는 우정식탁 ]
얼마 전 오랜만에 친구와 전화 통화를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요즘은 뭐 해 먹어?"
친구와 나는 반찬 고민을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반찬이 없어. 요즘 뭐 해 먹어야 하냐…”
습관처럼 내뱉은 말이었다.
어떤 특별한 의미도 담지 않은,
그냥, 요즘 왜 이렇게 밥 하기가 귀찮은지 모른다는 이야기.
친구와의 통화는 늘 그렇듯 아무 말 대잔치다.
반찬 얘기하다가 잠깐 웃고,
다시 인생 얘기로 흘러갔다가
드라마 속 캐릭터 욕 좀 하다가,
그렇게 한참을 떠들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두어 시간이 지났을 때 즈음
띵동, 벨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익숙한 얼굴, 늘 같은 표정으로 서 있는 내 친구.
양손에는 반찬통이 한가득이었다.
제육볶음, 두릅, 달걀말이, 열무김치, 배추 된장국, 부추전, 방풍나물 무침…
하나같이 정성스러운 반찬들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냥, 그 한마디에 마음을 움직였다는 걸.
우린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친구였다.
서로의 모든 것을 공유하고 같은 동네 살았기에 더 가까웠다.
첫 연애와 이별, 나의 독립, 친구의 결혼과 우리의 부모님들의 병원 입원까지
삶의 크고 작은 굴곡들을 함께 지나온 사이다.
핸드폰에 이 친구 이름이
“항상 내 편”으로 저장되어 있다.
그 어떤 순간에도 내 이야기에 반대의견을 말한 적 없고
응원해 주고 도와주는 든든한 지원군이다.
" 그런 거 하지 말아! " 무리야, 그만둬! 그런 말은
단 한 번도 나에게 하지 않았다.
내가 서툴게 무언가를 시작할 때면
그저 밥상을 차려주고, 커피를 내어주고,
묵묵히 들어주며
“그래도 넌 해낼 거야”라고
나보다 먼저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다.
밤늦게 불쑥 집으로 찾아가도
“왔어?” 하며 반찬 데우는 손길이 먼저고,
점심시간에 회사 앞으로 불쑥 찾아가면
향긋한 커피를 내어주는 친구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우정이란 의미가 조금씩 달라진다는 걸 느낀다.
어릴 적에는 함께 노는 게 우정이었다.
많은 시간을 함께 공유하며 사소한 것까지 똑같이 했던 사이.
성인 되면서는 서로 비밀을 나누는 사이가 친구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조금씩 삶이 복잡해질수록,
우정은 함께 웃는 것보다,
조용히 곁을 지키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가끔은,
우정이란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한 번은, 내가 너무 지쳐 그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던 시기에
이 친구가 해준 건 단 한 마디였다.
"그래, 오늘은 그냥 쉬자.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어"
네가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아.”라고
그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했던,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그냥 쉬어도 된다는 말.....
그 말이 내 마음을 얼마나 안심하게 했는지 모른다.
우정이 꼭 '힘내'라고 말해야만 성립되는 건 아니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우린 점점 만남의 횟수가 줄어들고 있다.
거리는 가까운데 서로의 생활에 불편함을 주기 싫어서
서로 배려하고 기다리는 게 익숙해졌다.
연락도 예전처럼 자주 하지 않는다.
거의 매일 점심시간이면 '점심 메뉴가 뭐니?'
'오전에 힘들게 한 사람은 없니?'의 짧은 대화를 자주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전화 통화나 만남의 횟수는 줄어들었는데도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은 더 깊어지고 있다.
예전엔 자주 만나고 많은 것을 함께 하는 게 친한 사이라 믿었는데
지금은 ‘한마디’에 모든 게 전해진다.
살면서 가장 든든한 관계는
사실 많은 말로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인 것 같다.
눈빛 하나, 말투 하나,
가끔은 그저 반찬 하나에
“나 아직 네 편이야”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도 변하고 멀어지기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가 가면 문을 열어줄 사람’이 있다는 건
참 고마운 일이다.
그 사람 앞에서는 괜히 어른인 척하지 않아도 되고
서툴고 어수선한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내보여도 괜찮다.
오히려 더 편하고, 따뜻하고, 깊어진다는 걸
반찬 한 상 앞에서 다시 한번 느낀다.
그날 나는 그저,
반찬이 없다고 말했을 뿐인데...
그 말 한마디를 마음에 담아
마음을 건네주고 간 친구가 곁에 있어 감사하다.
살다 보면 자꾸 말이 줄고, 표현이 줄고,
서로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 같을 때도 있지만...
이런 순간이, 그 모든 거리를 다시 잇게 한다.
그날 친구가 싸 온 반찬을 하나하나 꺼내며 생각했다.
밥상을 차려놓고 보니 울컥해지는 마음.
그 모든 순간이 말해주고 있었다.
"넌, 혼자가 아니야."
친구의 위로였다.
그날의 친구의 마음으로
오늘도 나는 든든하게 살아갈 힘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