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림 끝에 기다리던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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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berin

흔들림 끝에 기다리던 노을.


아침부터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익숙해진 공간과의 이별은

매번 서툴고, 늘 조금 분주하다.


발리 여행 4일째.
오늘은 뚤람벤에서

길리섬으로 이동하는 날이다.


어제 이곳 숙소에서 만난 한국분들과

다음 일정을 함께 하기로 했다.


바다 건너 어딘가에서,

또 다른 세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동은 생각보다 길었다.
숙소에서 항구까지 한참을 달렸고,

빠당 바이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배에 올랐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파도는 예상보다 거칠었고,
배는 상하좌우로 쉼 없이 흔들렸다.
그동안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던

‘뱃멀미’라는 감각을,
나는 그날 처음 온몸으로 배웠다.


몸이 중심을 잃고 흔들리자

마음도 따라 흐트러졌다.

이렇게 여행을 하는 게 맞는 걸까?

내 몸을 이렇게 힘들게 하면서,...

라는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멀미란 단순히 몸의 불편함을 넘어,
어딘가로 가는 ‘이동 중’이라는 상태가
얼마나 고단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강력한 감각 같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화장실 가까이로 자리를 옮겼다.


눈을 감고 파도에 몸을 맡긴 채,
그저 빨리 도착하기만을 바라며 시간을 버텼다.


그러다 문득 창밖을 보니,
햇살이 바다 위에 쏟아지며 반짝이고 있었다.

윤슬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몸은 지쳐 가고 있었지만

마음은 살짝이 웃고 있었다.


몸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지만
바다 위의 햇살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배에서 내려 땅을 디디는 순간,
새로운 장소에 내리는 한 발자국이
이토록 반가울 수 있구나 싶었다.


가방을 찾고 고개를 들었을 때,
길리 섬은 이미 황금빛 노을을

준비해 두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을은 말이 없었다.
조용하고 따뜻하게 나를 깊이 감싸 안아 주었다.


오렌지와 분홍빛이 번지듯 물든 하늘 아래,
저물어 가는 태양은 마치 하루를 잘 살아낸 사람처럼
느긋하고 단정하게 지고 있었다.


구름은 붓끝에 남은 물감처럼 스며 있었고,
바다 위에는 금빛 잔물결이 반짝이며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바람은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로
이마와 볼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오늘 하루 고생 많았다는 위로의 인사처럼,...

그 순간, 조금 전까지의 고단함이
바닷바람에 실려 서서히 사라졌다.


‘아, 나 잘 왔구나.’

몸보다 마음이 먼저 그렇게 속삭였다.


섬은 생각보다 북적였다.
한적한 곳에 있다가

갑자기 활기찬 도심으로 들어온 느낌.


낯설지 않은 이 분위기가 묘하게 반가웠다.

작은 가게마다 반짝이는 조명,
거리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라이브 음악,
맥주잔을 부딪치며 웃고 있는 여행자들.

그 자유로운 웃음 사이에서
나는 비로소 안도했다.

‘아, 나 진짜 여행을 왔구나.’

그제야 실감이 났다.


사실 몸은 많이 지쳐 있었다.
멀미에 시달리고, 이동에 허덕이고,
도착하자마자 낯선 숙소를 찾아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비포장 골목길을

이리저리 헤매야 했다.

그런데도 마음은 자꾸 말했다.
‘괜찮아.’
‘잘 왔어.’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을

내가 그렇게 토닥이고 있었다.


저녁 바람에 식어가는 몸,
말없이 곁을 지키는 바다의 리듬,
그리고 나 자신에게 건넨
“괜찮아”라는 작은 속삭임까지.


이 여행은
나를 믿고,
나를 지지하고,
나를 응원하는 시간이 되고 있었다.


몸과 마음이 많이 흔들리긴 했지만
내가 원하던 장소에 잘 도착했고,
몸은 고단했지만
마음만큼은 바다에게 받은 위로로 충분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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