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 없는 호의에 유연해지는 나를 느낀다.
우붓 관광을 마치고
밤늦게 다른 숙소에 도착했다.
이미 어둠이 깊게 내려앉은 시간이었고,
몸은 생각보다 많이 지쳐 있었다.
투어비를 지불하려는 순간 문제가 생겼다.
근처 편의점의 현금지급기가 있어서 갔는데
고장 나 있었던 것이다.
바쁘게 이동하느라
낮에 현금을 찾지 못한 걸 그제야 떠올렸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 순간은 꽤 난감했다.
그때 가이드님이
내 상황을 숙소 사장님께 설명해 주었고,
사장님은 잠시 상황을 살피더니
아무 말 없이 내 대신 투어비를 지불해 주셨다.
너무너무 감사했다.
낯선 나라에서, 낯선 사람에게서
아무 조건 없는 호의를 받는 순간은
마음을 먼저 풀어놓게 만든다.
그렇게 밤 11시가 되어서야 방에 들어왔다.
‘우선 쉬자.’
‘빨리 쉬자’
그렇게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이 숙소가 아주 오래되었고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낡은 가구, 삐걱거리는 매트리스.
그래도 좋았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파랗게 보이는 수영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제야 비로소
‘아, 내가 휴식을 취하러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자가 되면 정말 마음이 넓어지는 걸까.
평소엔 작은 일에도 쉽게 예민해지던 내가
낯선 땅에 도착하면 묘하게 유연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생각보다 좁고 낡은 숙소,
갑자기 쏟아지는 비,
예상치 못한 일정 변경.
일상이라면 짜증부터 났을 상황들인데
여행지에서는 이상하게도
감정보다 ‘해결’에 먼저 집중하게 된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가 아니라
‘어떻게 해결하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하는
생각의 방향이 달라진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되고 있었다.
여행은 나를 완전히 바꾸기보다는
낯선 변화에 적응하는 법을
조용히 연습하게 만든다.
하루를 그렇게 보내고 나면
불편했던 감정은 이미 다른 감정으로 옮겨가 있다.
상황을 해결하느라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던 덕분인지도 모른다.
짜증이 올라오기 전에
이미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 있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아마도 그건
‘멈출 수 없음’이 주는 선물일 것이다.
여행지에서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해결하지 않으면 다음으로 갈 수 없고,
적응하지 않으면
밥 한 끼조차 편하지 않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게 된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납득이 되지 않아도,
지금 이 상황을 넘어가야 하니까.
‘이해’보다 먼저 ‘수용’을 하게 된다.
아주 오래전 여행에서도
비슷한 감각을 한 번 배운 적이 있다.
처음 가본 도시, 길을 잘못 들어
밤 12시가 넘어서 숙소를 찾은 적이 있다.
배는 고프고, 휴대폰은 없었고, 말도 통하지 않고,
내가 있는 위치조차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당시에는 정말 조마조마했지만,
동네 구멍가게 아저씨의
어눌한 영어와 손짓 덕분에
무사히 숙소를 찾을 수 있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우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문제는 해결이 된다는 것을,...
"그래도 지나간다. 결국엔 도착하게 된다."
그 경험은 내게 큰 배움을 안겨줬다.
해결되지 않은 감정에 오래 머무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
모든 걸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리고,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불편함은 잠시라는 것.
여행이 나를 바꿨다고 단정할 순 없지만,
분명 무엇인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낯선 곳에서 수없이 겪은 크고 작은 변수들은
결국 ‘그럴 수 있어’라는 단어를 내 안에 새겨주었다.
돌아와서 일상을 살다 보면,
가끔은 다시 예전처럼 예민해지고 조급해진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 한편에서는
여행지에서의 내가 슬며시 고개를 든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럼 이제 뭘 할 수 있을까?”
감정을 누르거나 무시하는 게 아니라,
감정보다 상황을 먼저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감정이 지나가도록 스스로에게 시간을 주는 여유.
그건 여행이 내게 가르쳐 준,
가장 단단하고 유연한 삶의 방식이 되었다.
나는 오늘도 낯선 여행지에서 처음 겪는 상황에서
옛 경험을 떠올리며 " 그럴 수 있어"라며 조용히 나에게 속삭인다.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도
여행지에서처럼,
'그럴 수 있어', '그렇구나'를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내가 되기를 희망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