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머문 세계가 나를 조용히 물들이고 있다.

by Amberin


잠시 머문 세계가 나를 조용히 물들이고 있다.


11년 만에

을 다시 고르기 잠시 위해 떠나왔다.


조금은 멀어도 괜찮았다.

조용히 쉬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저 나로 존재해도 되는 쉼표가 필요했다.

아무런 계획이 없이 도착한.

이곳 발리로...




여행의 첫날은 늘 여러 감정이 겹친다.

설렘과 긴장,

그리고 이름 붙이기 어려운 작은 걱정들.


숙소에 도착했을 때,

낯선 장소에서 오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몸이 먼저 안도하는 걸 느꼈다.
'아, 일단은 잘 도착했구나.'


첫날에는 발리의 전통적인 모습을 보고 싶어서
우붓의 관광지를 천천히 걸었다.


햇살은 나뭇잎 사이로 조용히 스며들고,
공기에는 젖은 흙냄새와 꽃과 향내가 섞여
부드럽게 코끝을 스쳤다.


낯선 공기였지만

이상하게도 싫지 않았다.
순간, 문득 숨이 고요해졌다.


아무 말 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스르르 채워지는 풍경이었다.


이곳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자연 안에 살면서도
자연을 앞서려 하지 않고,
그저 자연의 리듬에 몸을 맞춰
하루를 살아간다는 느낌이 든다.


자연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되도록이면 해치지 않으려 애쓰는 태도.


매일 아침,

작은 나뭇잎 위에

밥, 과일 그리고 꽃과 향을 담아

자연에게 조용한 인사를 건넨다.


새들이 먹을 수 있게 나무 위에 올려놓기도 하고

개미들이 먹을 수 있게 집 문 앞과 창틀과 담장 위에,...


그 모습은 마치

오래된 친구에게 보내는

다정한 마음 같았다.



배가 고프면 먹고,

배가 부르면 멈추고,

도마뱀이 벽을 타고 지나가도

“사람을 해치지 않으니까, ”라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과일주스에 설탕을 넣지 않고,

음식에는 과한 조미료는 더하지 않는다.


자연을 침범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

일상의 선택들 속에 스며 있다.


거리에는 수많은 오토바이와 자동차들이

복잡하게 뒤엉켜 움직인다.

처음엔 조금 어지러웠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소란스러움이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클랙슨은

싸움의 신호가 아니라 배려의 언어다.

“제가 먼저 지나갈게요, 조금만 비켜줄래요?”

짧게 두 번 울리면

앞차는 살짝 비켜주고,

지나가며 고맙다는 표시로

짧게 "빵" 하고 답을 한다.


도로가 막힌 어느 순간에도

누구 하나 소리 지르지 않고.

사람들은 묵묵히 기다린다.


앞에서 작은 접촉 사고가 있었지만

지나는 이들은

창밖으로 얼굴을 살짝 내밀고

각자의 길로 조용히 돌아간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던 관광지.

발리 스윙 그네를 타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오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 누구도 허둥대지 않았다.

잠시 비를 피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올 뿐.

천천히, 자기 리듬대로 움직인다.


어린아이들은

개구리 왕눈이처럼

떨어져 진 큰 나뭇잎을 우산 삼아

계단식 논을 저벅저벅 걸어 올라간다.


두 눈은 반짝이고,

신이 난 두발은

좀처럼 땅에 붙어 있질 않는다.

어찌나 즐겁고 사랑스러워 보이는지,...


비를 피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비와 함께 노는 법을
이미 알고 있는 얼굴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곳에서는
삶이 먼저 흐르고,
상황은 그다음이라는 것을...


낯선 곳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왠지 더 따뜻해 보인다.


서툴게 건네는 인사에도

진심이 담겨 있었고,

미소는 늘 먼저 건네졌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말없이 다정했고, 따뜻했다.


인상을 찌푸린 얼굴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의 표정도 달라지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꽤 많은 선입견과

나만의 기준 속에서 살고 있었다.


일 처리가 느리면 내 마음이 조급해졌고,

식당이나 관공서에서의 불친절을 경험하면

마음속으로 평가하고 판단했었다.


마치

내 생각만이 옳은 것처럼.

그렇게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날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번여행을 통해

조금은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나는 이곳에

‘잠시’ 머무는 여행자일 뿐이라는 것.

이들의 삶에

내 기준을 들이밀 필요가 없다는 것.


다양함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자

낯선 곳에서 새로운 것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조금은 부드럽고 넓어지고 있다.


이번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굳어 있던

내 마음의 경직된 부분들을

천천히 풀어내고,

내려놓는 시간이 되고 있다.


조급함은 한 박자 늦춰지고,

판단은 잠시 멈추고

누군가를 이해하려 애쓰던 마음도
그대로 두고 바라보는 법을 배우면서


나는 이곳의 공기처럼
서두르지 않고,
소리 내지 않으며
조용히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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