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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Apr 04. 2024

무소속 후보

나의 시_126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나는 있습니다

땅이 없는 땅

하늘이 없는 하늘

벽이 없고 천장도 없는

어느 낡은 지하철 역사

그 속에서 부유하는 먼지의 눈치를 보며

나는 있습니다


없습니다

입이 있으나 입이 없습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 않아야 한다며

돈이 없는 자는 혓바닥을 저당잡힌 채

말 대신 눈을 꿈뻑해도 된다고 쓰여 있는

똥 닦은 휴지처럼 소중한

종이쪼가리를 한 장 샀습니다


사라집니다

'나는'

이라고 볼펜으로 썼습니다

없어집니다

'저는'

이라고 먹물로 썼습니다

비웃습니다

'이 몸은'

이라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썼습니다

도망칩니다

'에라 엿이나 먹어라'

라고 침을 뱉었습니다

종이가 아가리를 벌리고 말합니다

"천 명의 침을 더 모아 와

그럼 글씨가 지워지지 않을 거야"


잃었습니다

어릴 적 선물받은 찬란한 열두 색 크레파스

비 온 뒤 주르륵 펼쳐지던 무지개

봉사도 감은 눈을 뜨게 하는 개나리 그리고 진달래

먼 옛날 엄마가 눈두덩이에 칠하던 그것까지도

단 두 가지 색깔에만 이름을 붙여 주고

나머지 색깔은 모두 사형에 처하는

마녀(마법사일지도 모르겠습니다)의 단두대에서

이름마냥 모가지가 댕강 잘렸습니다


그러니

어느 날 갑자기

코끼리보다 덩치 큰 먼지를

지하철 타러 달려가는 혓바닥들 사이에서

보았다면 아니 본 것 같다면

당신은 마녀(마법사라고 하는 게 나을까요?)의 시험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입은 옷의 색깔은?"

심하세요(당신에게만 알려드립니다)

마녀(혹은 마법사)는 혓바닥 색을 좋아한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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