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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Jun 25. 2024

참으로 귀한 인사

일상기록

건명이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오다가 애를 먼저 집에 들여보내고 편의점으로 갔다. 건명이 교통카드를 사기 위해서였다. 녀석은 갖고있던 교통카드를 언제 어디서였는지도 모르게 잃어버리고 일회용 카드를 매번 사서 쓰고 있었다. 녀석다운 일이긴 했다.


편의점에 들어가서 교통카드를 달라고 하니 직원이 몇 가지를 내놓으며 골라보라고 한다. 눈만 있고 입은 없는 고양이(키티) 그림이 있는 것 등이 있었으나 고2 남학생에게 그런 걸 사줄수는 없어서 까맣고 별 무늬 없는 걸 택했다. 그런데 다른 카드와 달리 이건 사용할 사람 생년월일을 입력하라고 한다. 직원에게 건명이 생년월일을 알려주었는데 뭐가 잘 안되는지 삐 삐 에러음만 나오고 일은 진척이 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어느 여자분이 콘 아이스크림과 맥주 두 캔을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직원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 재차 카드 등록을 시도하였으나 에러음만 계속 나올 뿐 잘 안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기다리던 나는 계산대의 아이스크림에 눈이 갔다. 나는 여자분에게 "오래 걸릴 것 같은데 먼저 계산하세요" 라며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그러자 뜻밖에도 그 여자분이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더운 날씨에 아이스크림 계산이 지체되어 짜증이 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런 인사를 하니 내쪽에서 오히려 당황했다. 직원은 약간 편해진 얼굴로 아이스크림과 맥주 계산을 마쳤고, 여자분은 계산 후 다시 한번 고개를 살짝 숙이며 나에게 인사했다. 나도 같이 고개를 숙였다. 어린이집 아기들이 서로 배꼽인사를 하듯이. 그리고 나는 말썽을 일으키는 카드 대신 다른 그림(다소 게으른 모습으로 늘어져 있는, 괴물인지 동물인지 헷갈리는 캐릭터)이 있는 카드를 골라 금액을 충전하고 집으로 왔다.


화도 많고 만족도 없는 사람이 넘쳐나는 요즘이다. 남에게 무언가를 해 주었을 때 고맙다고 하는 사람도 최근에 본 적이 없고, 자기 일이 잘 안 되었을 때 짜증이나 진상을 부리지 않는 경우도 참 드문 것 같다. 인터넷 기사의 사회면도 온통 그런 내용 뿐이다. 그런 와중에 오늘 그 여자분의 침착한 기다림과 인사는 참으로 귀하게 느껴졌다. 기다릴 줄 아는 여유, 그리고 별 것 아닌 호의(?)에 대한 고마움 표시, 참 오랜만이다. 퇴근길 전철에 마치 나를 기다리듯 비어있는 자리 하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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