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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잠 Mar 07. 2020

김영하, 여행의 이유: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

여행이 주는 의미들

출퇴근 시간에 ebook을 통해 틈틈이 읽은 김영하작가의 여행의 이유. 부담없이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에세이를 가장 좋아하는데 (게다가 책읽기 초보라 어려운 책을 잘 읽지 못한다.), 김영하작가의 에세이는 그동안 읽었던 에세이 중에서 가장 많은 지식들이 들어가 있는 (역시 소설가 다운) 에세이였다. 필력이 좋다는 것은 이런 의미이구나. 중간중간 조금은 어렵고 생소할 법한 지식도 지루하지 않도록 깔끔하게 여행의 경험과 엮어서 풀어낸 부분이 매우 감동적이었다.

단순히 여행을 하는 것에 대한 후기를 적은 글이 아니라, 김영하 작가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인생에 대한 철학과 같은 부분을 여행의 경험을 사례로 들어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여행서적과는 달라서 더더욱 좋았다.  



잠깐 머무는 호텔에서 우리는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잘 정리되어 있으며, 설령 어질러진다 해도 떠나면 그만이다. 호텔 청소의 기본 원칙은 이미 다녀간 투숙객의 흔적을 완벽히 제거하는 것이다.

호텔은 집요하게 기억을 지운다. 이전 투숙객의 기억은 물론이거니와 내가 전날 남겼던 생활의 흔적도 지워지거나 살짝 달라져 있다.

그래서 일상사가 번다하고 골치 아플수록 여행지의 호텔은 더 큰 만족을 준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 문제들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고 나에게 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할 것만 같다. 삶이 부과하는 문제가 까다로울수록 나는 여행을 더 갈망했다.

인생의 난제들이 포위하고 위협할 때면 언제나 달아났다. 이제 우리는 칼과 창을 든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다른 적, 나의 의지와 기력을 소모시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대결한다. 때로는 내가 강하고, 때로는 적이 강하다. 적의 세력이 나를 압도 할 때는 이길 방법이 없다. 그럴 때는 삼십육계의 마지막 계책을 써야 한다.

여행의 이유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으로부터 달아나기>


<오직 현재>에 나타난 여행에 대한 생각은 내가 평소 여행에 대해 가진 생각과도 비슷했다.

난 어딘가 멀리로 장기간 떠나는 여행은 그다지 좋아하진 않기에, 꼭 비행기를 타고 해외여행을 가지 않더라도 현실과 조금은 동떨어진 곳에서 며칠을 지내는 것도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매년 락페스티벌은 현실도피에 가까운 여행과 마찬가지였는데, 그 곳에서는 미래의 일은 생각할 겨를이 없다.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맥주 한모금에 내 체력을 유지하고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보는 순간은 내가 원래 살던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다.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이 안의 세계 외에는 큰 관심이 없다. 그만큼 돌아가는 순간은 고통스럽지만, 어쨌든 잠깐이라도 책속의 흔들림 없는 평온한 상태에 근접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다.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일종의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낯선 곳에서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먹을 것과 잘 곳을 확보하고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이 거듭하여 말한 것처럼 미래에 대한 근심과 과거에 대한 후회를 줄이고 현재에 집중할 때, 인간은 흔들림 없는 평온의 상태에 근접한다.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만 머물게 하고, 일상의 근심과 후회, 미련으로부터 해방시킨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정리했다.
그래, 나는 여행을 하고 제작진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시청자는 그중 아주 일부를 보게 되겠지.

여행의 이유 <오직 현재>


마지막 챕터의 <여행으로 돌아가다> 의 모든 글귀들이 좋았다. 여행은 일상의 부재라는 것은 모든 여행자들이 공감하는 말이 아닐까. 책을 읽는 내내 김영하 작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절로 떠오르면서, 누군가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현실은 어지럽고 복잡하고 무질서하다. 자잘한 일들이 끝없이 일어나고, 그중 어떤 것은 우리 삶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하지만 개개의 사건들에 일일이 주의를 기울일 수는 없다.

현실은 줄거리가 없다. 어떤 일들이 불쑥불쑥 일어난다. 때로 우리의 통제력을 벗어난다. 아름다운 별똥별이라고 생각하고 쳐다보던 무언가가 거대한 운석으로 우리 머리 위로 떨어질 수도 있다. 대단한 일처럼 생각하고 긴장했지만 별일 아닌 것으로 판명되기도 한다. 우주는 우리의 운명에 무심하며 우리는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인간은 왜 여행을 꿈꾸는가. 그것은 독자가 왜 매번 새로운 소설을 찾아 읽는가와 비슷할 것이다. 여행은 고되고, 위험하며, 비용도 든다. 가만히 자기 집 소파에 드러누워 감자칩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는 게 돈도 안 들고 안전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니,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게 된다, 라고도 말할 수 있다.

여행의 이유 <여행으로 돌아가다>


누군가에게나 일상을 탈피하는 행위 자체가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비행기를 타고 먼 나라로 떠나는 일이, 나에게는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는 락페스티벌을 가는 일이, 또 누군가에게는 집이 아닌 곳 자체가 모두 여행일 수 있다.

그리고 짧은 그 여행의 순간들이 무질서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여행이 가고 싶어졌다. 어렸을 때 꿈꾸던 그 곳들을 언제 갈 수 있을까!


여행이 내 인생이었고, 인생이 곧 여행이었다!

여행의 감각을 일깨우는 소설가 김영하의 매혹적인 이야기 『여행의 이유』. 꽤 오래전부터 여행에 대해 쓰고 싶었던 저자가 처음 여행을 떠났던 순간부터 최근의 여행까지 자신의 모든 여행의 경험을 담아 써내려간 아홉 개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지나온 삶에서 글쓰기와 여행을 가장 많이, 열심히 해온 저자는 여행이 자신에게 무엇이었는지, 무엇이었기에 그렇게 꾸준히 다녔던 것인지, 인간들은 왜 여행을 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고, 여행의 이유를 찾아가며 그 답을 알아가고자 한다.

2005년, 집필을 위한 중국 체류 계획을 세우고 중국으로 떠났으나 입국을 거부당하고 추방당했던 일화로 시작해 사람들이 여행을 하는 목적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는 《추방과 멀미》, 일상과 가족, 인간관계에서 오는 상처와 피로로부터 도망치듯 떠나는 여행에 관해 다룬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즐겁고 유쾌하게만 보이는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에 출연하면서 하게 된 독특한 여행에 대한 글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여행》 등의 이야기를 통해 매순간 여행을 소망하는 여행자의 삶, 여행의 의미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게 된다.

여행의 이유 책 소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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