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
빨래가 많다.
지난 주말 아이들이 사인펜을 묻히고 국물을 흘렸던 옷도 있고, 밤새 업혀서 까르르 웃다가 어느 순간 잠들었던 18개월 둘째의 콧물로 등이 범벅이 된 티셔츠도, 드럼 세탁기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조금은 굳어진 세제 가루를 흰색 플라스틱 숟갈로 긁듯이 파내어 세제 삽입구에 넣은 뒤 전원을 눌렀다. 제법 좋은 세탁기지만 첫째가 거실을 마구 뛰어 다니는 소리만큼 큰 소음이 난다.
"사진 안 지웠지?"
빙글 도는 빨래가 유발한 기립성 저혈압을, 입안에서 하이네켄의 쌉쌀한 탄산이 부서지는 것으로 달래고 있을 때, 일곱 살 아이가 전화로 확인한다. 오늘 간 마트 장난감 코너에서 한참 동안이나 만지고 안아보고, 장화 신은 고양이의 눈으로 아빠의 눈을 잠시나마 흔들리게 했던 신상 레고세트를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이 올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게 하는 아이의 소중한 이유인가 보다.
아이가 세상에 나왔을 때,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아이의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건강하게만 맞이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던 아빠였지만 7년의 시간은 아빠를 이렇게 간사하게 만들었다.
40년 가까이 미루기만 한 내 마음의 빨래는, 달이 지는 서쪽 대도시 어딘가에서 다리 사이에 이불을 끼워서 자는 똑같은 잠버릇을 지닌 귀여운 세탁기가 늘 쌔근쌔근 대신해주고 있다. 지금 건조대에서 나는 은은한 세제의 내음이 내게는 잠 못 드는 12월 요즈음의 눈꽃 향기보다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