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순간에도 우리는 살아간다
“나는 죽기 살기로 하고 있는데 너는 왜 그런 거야?”
첫 번 째 퇴사 후, 처음으로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시작했다. 집과 정 반대인 일산에서 왕복 5시간의 거리를 오가며 영상번역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퇴직금을 털어가며 내가 선택했고 하고 싶은 일이었으니까 단단히 마음을 먹으며 버스 안에서 최대한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배우는 중이었다. 팀을 이뤄서 결과물을 내야 하는 과제물을 하면서 함께한 언니가 나에게 쓴 소리를 던졌다. 자신은 직장도 관두고 여기에 올인하고 있는데 너는 왜 나만큼 열정적이지 않냐며 불만을 내뱉었다. 나는 늦지 않게 다시 반대편 집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막차가 끊기기 전에 나서야 했다. 또 하루 종일 둘이 앉아서 고민을 하느니 각 자가 할 일을 하고 결과물을 만드는 게 더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끝까지 밤을 새워가며 하지 않는 나에게 던진 질타의 말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모든 행사에 참여하고 발표를 하는 적극적인 아이였다.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던 나. 초등학교 6학년 졸업식 날, 졸업장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눠주시던 담임 선생님이 조용히 나에게 말씀하셨다. 졸업식 날이니 반에 학부모님들도 꽃다발을 들고 축하를 하러 모여있었다.
“겸손해져라.”
물론 아주 작게 말씀하셔서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았지만 머리 속을 울리던 그 말이 지금도 떠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활동하는 내가 그렇게 눈에 가시처럼 보였던 걸까. 하필 졸업식 날 좋은 말을 하기에도 모자란 그 날 그렇게 이야기를 하셨다. 그 이후부터다.
살던 곳에서 이사를 하고 사춘기를 거치면서 성격을 180도 달라졌다. 절대 나서지 않고 조용히 내 할 일만 아이가 되어버렸다. 혼자 공상하고 책을 읽고 가끔 글을 쓰며 나만의 세계로 점점 깊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소심한 아이가 되어버렸다.
“여보세요.”
울리는 전화를 받으면
“야, 너 자냐?”
라는 말부터 시작된다. 목소리 톤도 작아지고 느려졌던 모양이다. 말을 하면 내 목소리가 내 귓가에서 크게 울려 스스로는 힘차게 얘기한다고 하지만 그리 크지 않았던 것 같다. 큰 목소리를 내면 나에게 집중하는 시선들이 부담스러웠고 어떤 지적을 받게 될까 봐 두려웠다. 가만히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고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는 것이 더 편했다.
가끔 나의 힘없는 외모가 싫을 때가 있다. 다른 사람 눈에 비춰진 내 모습을 신경 쓰고 싶지 않지만 그럴 수 없다. 아닌 척, 괜찮은 척 그렇게 척척척 했지만 마음 안으로 상처를 차곡차곡 쌓아갔다.
한 때는 외향적인 사람들이 추앙 받던 시절이 있었다. 회식자리에서 앞에 나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분위기를 신나게 하고, 모든 동아리에서도 적극적인 참여를 해야 했으며, 남의 시선에 들어오도록 행동해야 했다. 정 반대인 사람은 그런 일들을 어쩔 수 없이 하면서 이중적인 자신의 모습을 견디며 살았다. 다행히 지금은 나와 같은 사람들을 받아들여주고 있는 시대가 다가 와 이렇게 꾹꾹 눌러 마음을 담고 있다.
타인의 시선이 따가워서 툭 던진 말에도 상처를 받아서 혼자가 더 편한 시간들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혼자 지내는 시간을 즐거워한다고 사회와 고립된 외톨이가 아니다. 음악을 듣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며 날이 좋을 때는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가기도 한다. 나의 내면의 힘을 끌어올려 글을 쓰기도 하고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여유롭게 즐기기도 한다. 다른 사람과 인연을 끊고 살지 않기에 가끔 만나 신나게 수다도 떨고 가끔 만나니 상대방의 이야기도 더 공감해서 잘 들어줄 수가 있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깔깔거리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친구가 없으면 아무데도 못 갈 정도였다. 추운 겨울 우리 집 시계였던 내가 조금 늦게 들어오니 엄마가 “오늘은 좀 늦었네.” 라고 말씀하셨다. “응. 버스 정류장에서 오뎅 하나 먹고 왔지.”,”혼자서?”,”그럼!”
어느 순간부터 나를 친구들의 시간에 맞추는 일이 버거웠다. 보고는 싶지만 나의 시간과 노력을 수다 떠는 일에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조금 더 몰두하고 싶어졌다. 친구들의 취향이 아닌 나의 취향에 맞는 것을 하고 싶어졌다.
“뭐 먹을까?”
“아무거나, 너 좋아하는 거.”
라고 항상 말하던 나. 지금도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거,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자고 제안은 해 본다. 한 쪽으로 기우는 만남은 아무리 절친이라고 해도 오래 만나기 힘이 드는 것 같다. 나에게 잘 맞춰주고 자신의 의견을 잘 내지 않던 친구가 어느 날 ‘나는 이것 먹고 싶어.’라고 한다면 놀라지 말자. 그 동안 나에게 맞춰 준 시간들을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