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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거야 Mar 20. 2023

윤희의 할머니

윤희의 할머니


 생각해보면 윤희가 나에 대해 좋은 감정만 가지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언젠가 미용실에서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파마를 한 윤희가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 유치원에서 혼자 돌아온 적이 있었다. 혼자서 걸어오다가 윤희의 엄마를 만났는데 어째서 윤희와 함께 오지 않느냐는 질문에 나는 윤희가 못생겨서 혼자 왔다고 대답했다. 그 때 윤희 엄마의 못마땅한 얼굴을 보면서도 나는 콧방귀를 뀌며 당당하게 집으로 돌아와서 윤희가 못생겨서 윤희랑 그만 놀고 싶다고 선전포고까지 하였다. 어른들은 맹랑한 내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그 이후로도 나는 대놓고 윤희가 못생겼다는 말을 여기저기에 하고 다녔다. 그런 나의 말이 윤희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리 없었다. 이제 와서는 아마 그 때 내게 품은 속상한 마음을 담아 두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이 미치지만 그 때에는 생각이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했음에도 나는 윤희를 용서했고 우리는 얼렁뚱땅 화해했다. 우리는 다시 손을 잡고 동네를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마음은 젤리처럼 말랑거려서 괘씸이고 배신이고 뭐고 간에 쉽게 용서해 버리고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심심하면 윤희의 집 앞에서 윤희를 불렀다. 윤희네 대문은 잠겨있지 않고 빼꼼히 열어져 있었기 때문에 나는 거리낌 없이 대문을 밀고 들어가 마당에서 윤희를 불렀다. 그러나 그렇게 허물없이 드나드는 나를 못마땅해 하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는데 그는 바로 윤희의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내가 있더라도 맛있고 귀한 것이 있으면 꼭 윤희와 윤희의 오빠에게만 주었다. 언젠가는 윤희와 노는데 윤희가 안방에 드나들면서 입을 오물거리는 것이었다. 나는 즉각적으로 “뭐 먹어?”하고 물었다. 윤희는 “밤”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나도 주라.”하고 요청했고 내 말에 윤희는 안방에 가서 까져있는 삶은 밤을 가지고 와 내 입에 넣어주었다. 그 밤을 입안에서 다 씹기도 전에 윤희 할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내용인즉슨 손주들 주려고 공들여 까놓은 밤을 딴 놈이 먹는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저도 즈그 집에 가서 밤 주라고 해라.” 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어린 나이였어도 그 말이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줄 알았다. 나는 서러워져서 엄마에게 달려가 하소연했다. 


 그러나 곧 서러움을 잊어버리고 또 윤희네 집에 가서 놀았다. 나는 할머니를 피해 다니면서 할머니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놀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언제나 어설펐는데 숨바꼭질을 할 때에 눈치 없이 장독대 사이에 숨은 적도 있었다. 할머니의 노기충천한 잔소리를 들으며 나는 장독대 사이에서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그러나 나는 할머니가 조금 무섭긴 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그 때는 그러한 것들이 누군가와의 관계에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그저 할머니가 조금 예민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윤희의 할머니가 집에 없었던 날이 있었다. 나는 그날 윤희의 집에서 마음 놓고 놀았다. 그러다 오후가 되었다. 나는 좀 지루해졌고 윤희는 시장에 간 할머니를 애타게 기다렸다. 나도 윤희를 따라 할머니를 기다렸다. 대문 밖에 나가 몇 십분 이나 할머니를 기다리니 나는 할머니가 간절해졌다. 윤희네 대문 정면으로 향한 기다란 길에서 할머니가 곧 걸어 내려 올 것 같았다. 할머니를 먼저 발견한 것은 나였다. 나는 멀리에서부터 걸어오는 뿌연 실루엣을 유심히 보다가 “할머니다!”하고 외쳤다. 할머니를 향해 뛰어간 것은 윤희였다. 멀리에서부터 할머니가 점점 가까워지자 할머니의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자전거를 끌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기뻐 할머니가 내 앞으로 올 때 까지 할머니와 자전거만 바라보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나를 보지도 않고 지나쳐 마당에서 할머니의 손주들을 불러 들였다. 방에 있던 윤희의 오빠를 불러낸 할머니는 자전거의 첫 시승을 하도록 했다. 윤희의 오빠가 첫 테이프를 끊고 윤희도 이어서 자전거를 타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보고 서 있어도 내 차례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자전거를 타보지 못한 서운함보다 그들의 즐거움에 내가 포함되지 않다는 것이 서러워져서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나를 안고 다독여 주었지만 마음이 다 풀리지는 않았다. 내가 아무리 자전거를 사달라고 졸라도 당시 우리 집은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우리 엄마에게는 자전거를 대신 사다줄 엄마가 없었고 아빠의 엄마는 멀리 시골에 계실 뿐이었다.


 그 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윤희네 집 대문 앞에서 멀리 내다보고 있을 때 윤희의 할머니가 저 멀리에서 자전거를 끌고 오는 것이다. 할머니는 뽀얗고 흐릿한 모습으로 점점 내게 다가왔다. 그러나 꿈속에서 그녀는 우리 모두의 할머니였다. 꿈속에서 우리 모두의 할머니는 우리 모두의 자전거를 가지고 천천히 우리 앞으로 걸어왔다. 그 후로도 몇 번이나 같은 꿈을 꾸었는데 단 한 번도 자전거를 탈 수는 없었다. 언제나 할머니는 천천히 우리를 향해 걸어오는데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할머니가 가져오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직접 해 볼 수 있든 아니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에게 중요했던 것은 윤희가 기다리고 있는 기대와 할머니가 준비한 기쁨에 나도 참여할 수 있는 것이었다. 꿈은 늘 그 기쁨에 참여할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끝이 났지만 나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것을 눈앞에 보면서 기다리는 벅찬 가슴 하나로 그 꿈은 언제나 황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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