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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전 열한시 May 16. 2020

일흔 살, 엄마의 미니멀 라이프

엄마의 삶을 응원합니다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엄마는 늘 앞치마를 두른 모습이었다. 온기가 도는 부엌은 언제나 음식 만드는 소리로 분주했고 우리 집은 엄마의 손길로 늘 정돈되어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엄마는 미니멀리스트와는 거리가 먼 꽉 채운 살림꾼의 면모를 가진 분이었다. 사은품 하나 더 받는 것을 알뜰함의 신념처럼 여기며 그렇게 평생을 채우며 살아오셨다.

내가 지켜봐 온 엄마의 과거에 덜어내기란 없었다.


그런 엄마가 지금은 나보다 더 미니멀한 삶을 살게 되셨으니 그 계기는 바로 평수를 줄인 새 아파트로의 이사였다. 25년을 살아온 집을 떠나며 일흔을 앞두고 엄마는 정리를 시작하셨다.

오래된 가구와 가전, 낡은 옷가지들, 색색깔의 이불들

베란다를 꽉 채운 화분과 부엌 가득한 그릇들  

오랜 손길이 깃든 살림들을 하나씩 처분해 가셨다.


엄마의 부탁을 받고 지역 카페에 가구와 가전 등을 헐값에 올려드리면 싼 가격 탓에 이내 판매가 되었다. 대부분은 이웃에 기부를 하셨는데 쓸만한 물건은 절대 버리시지 않았다. 다양한 방법으로 물건들을 줄여가며 소소한 나눔의 즐거움은 늘려가셨다.

새 아파트 입주를 기다리는 몇 해 동안 집안의 물건들은 그렇게 하나씩 비워져 나갔고 마지막에는 휑한 공간만이 남았다. 이삿짐이 거의 없어질 만큼의 선명한 비움이었다.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물건에 깃든 것은 단지 세월만은 아닐 것이다.

물건에 이입되는 감정은 노년의 인간이 가지는 당연한 애착이다.

하나의 물건에 깃든 하나의 추억을 비우는 일은 마흔 해 넘는 삶을 살아온 내게도 늘 어려운 일이었다. 일흔의 엄마에게 살림을 정리한다는 것이  단지 물건을 버리는 단순한 행위만은 아니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되는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옛 물건에, 추억에 집착하게 된다. 나의 물건이 없어지는 것이 나의 젊음을 부정당하는 일인 듯  맹목적으로 자신의 물건을 지키려 하는 모습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내 아버지가 바로 그 당사자이기도 하다.

비움의 과정에서 가장 힘든 일은 함께 사는 가족과의 조율이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간소화된 집에서 가장  만족도가 크신 분 또한 아버지이니 비움을 위한 조율은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를 수반하더라도 해 봄직하다.


몇 해 전 남편과 함께 남편의 외숙모님을 댁으로 찾아뵌 적이 있다. 숙모님은 건강이 많이 좋지 않다고 하셨는데 집안 살림의 규모는 건강이 압도당할 것만 같은 그것이었다.

이 먼지를 과연 닦으실 수 있을지, 복잡한 주방에서 잘 챙겨 드실 수 있을지 마음속 걱정과 안타까움이 아직도 또렷하다.


바쁘게 살아온 젊은 날이 지나고 노년의 시간이 오면 더 오랜 시간 우리는 집에 머물게 된다.

단순한 휴식의 공간을 넘어 집은 노년의 시간 대부분을 보내는 삶의 터전이자 마지막 여정이다. 떨어진 체력에 알맞은 간소화된 살림이 필요하다. 많은 장식품과 그릇들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간소한 된 살림은 노년의 삶에 편안한 쉼을 가져다준다.


꼭 남기고 싶은 것

남겨져도 좋을 것


인생의 후반부는 진짜 설레는 것들로 채워야 한다. 정말 갖고 싶었던 것을 소유하는 기쁨 또한 누려봐야 할 일이다.

엄마의 진짜 취향은 싼 맛에 샀던 색색의 이불이 아니라 새하얀 이불이었다.

비움 후 엄마의 채움은 어느 때보다 신중했지만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


칠순의 나이에 새댁처럼 새 그릇을 사고 새 전자제품을 들이고 새조명을 사시며 새댁처럼 웃으셨던 엄마

새살림을 장만하는 엄마를 보며 알았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적다는 것은 그만큼 더 간절한 삶의 열망을 갖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흔의 비움은 모든 것을 내려놓는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가져다주었다. 집의 크기는 줄어들었지만 공간만은 전혀 줄어들지 않은 엄마의 집


새 집을 방문한 사람들의 물음 - “아직 이사 덜 하신 거죠?

이 질문이 너무도 유쾌하셨다는 엄마는 이제 진정한 미니멀리스트다.


엄마는 오늘도 살림을 한다.

예전보다 더 신나게, 더 가볍게


신혼의 새살림만큼 빛나는 엄마의 미니멀 라이프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자 아름다운 마무리다.



@a.m_11_00

인스타그램에 매일의 살림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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