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도 아들 둘의 엄마가 될 거라는 상상을 나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둘째는 딸일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깨지던 날 나는 울었다. 내 인생에 딸이 없다니…….
함께 목욕을 하고 몇 안 되는 명품가방을 고이 쓰고 물려줄 딸이 사라지던 날의 상실감은 둘째를 키우며 완벽하게 사라졌다. 둘째는 열 딸 부럽지 않을 만큼 다정한 아들이었다. 아장아장 걷던 때부터 밖에 나갈 때면 엄마 신발을 끌어다 놓는 아이였다.
그날의 눈물은 두고두고 미안한 일이 되었다.
생각보다 아들 둘의 엄마는 행복한 자리였다. 둘째를 낳고 병원에서 만난 딸 둘의 산모가 “제가 훨씬 났네요.”라는 말을 건네었을 때 반박했어야 했다.
우스개 소리로 딸 둘은 금메달, 아들 딸은 은메달, 아들 둘은 목 매달이라는 말까지 있지만 나의 메달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이제 내 키보다 훨씬 큰 두 아들과 길을 나서면 나는 세상 든든한 엄마가 된다.
어느 여름밤, 음식물쓰레기를 버리고 들어오다 어둑어둑한 아파트 구석에서 교복을 입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학생 둘을 만났다. 내가 손수 빨아 입히는 둘째 아이 학교의 교복이었다. 내 키보다 큰 성인 남성의 체형을 가졌지만 아이였다. 다짜고짜 다가갔고 생각 없이 말이 먼저 나왔던 건 내가 아들의 엄마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아이는 내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얘들아 엄마가 알면 얼마나 속상하시겠니? 담배가 너네 몸에 얼마나 해로운데……하지 마”
아이들은 이내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진심을 담아 걱정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라도 가서 닿을 수 있다.
가까이에서 본 아이들의 얼굴이 참 말갛고 예뻤다. 멀리에서 보면 언제나 시커먼 그림자만 더 크게 보인다.
언젠가 ‘옆집 아이가 잘 커야 내 아이도 잘 큰다.’는 글귀를 읽은 적이 있다. 잘 키운 내 아이 인생을 잘못 자란 옆집 아이가 망쳐놓을 수도 있다는 글이었다. 출처도 생각나지 않지만 아이를 키우는 내내 잊히지 않는 글귀다.
아이를 키우는 데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고 했다. 세상 필요 없는 것이 오지랖이라고 생각하는 개인주의자에 가까운 나지만 아이들에게만은 어른들의 따뜻한 오지랖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아이에게 바르고 좋은 친구가 많았으면 좋겠다. 아이가 사는 세상에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아이가 자주 따뜻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혹시라도 내가 없는 순간에 아이가 잘못된 길로 향하고 있다면 누구든 불러 세워주었으면 좋겠다.
아들의 엄마로 사는 것은 조금 더 목소리가 커지는 일이 맞다. 아들 엄마는 깡패가 된다는데 나는 정말 겁이 없어지고 있다.
세상의 모든 아들 엄마는 훨씬 용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