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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전 열한시 Sep 27. 2022

죄책감 버리기

내가 아이 하나를 키웠더라면 어쩌면 더 많은 죄책감을 가진 엄마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늘 그게 가장 무서웠다. 나 때문에 아이가 이러는 걸까?

내가 바쁘다고 책 읽기를 덜해줘서 너는 형보다 책 읽기를 덜 좋아하게 된 걸까?

너무 많이 놀아준 첫째가 혼자서는 잘 놀지 못할 때에도 나는 내 탓부터 했다.

넘쳐서도 부족해서도 안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아이의 부족한 면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내게서 원인을 찾고 있었다. 나로 인해 일어나는 많은 일들 중에 아이만큼 두려운 결과가 있을까?

하지만 아이들이 내 키를 넘길 만큼 크고 보니 대부분의 일들이 내가 아닌 아이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룽지를 조식으로 즐기는 둘째와 절대 먹지 않는 첫째를 보면 내가 해 준 음식조차 아이들의 타고난 식성을 변화시키지는 못하는 듯하다. 언제나 타고난 성향과 기질이 양육 태도나 환경보다 먼저였다.

아장아장 걷던 때부터 집에서 나설 때면 엄마 신발을 돌려놓던 둘째의 다정함은 둘째가 가지고 태어난 성품인 것이다. 배려와 욕심 또한 그릇만큼 아이는 품고 있었다.

학습에 있어서도 그랬다. 공부하라고 다그친다고 하지 않는다. 스스로 해야겠다고 결심하는 순간부터 아이의 눈빛에서 불꽃이 튀었다. 마음먹은 시점이 너무 늦었나 싶지만 열심히 하는 아이를 보면 백세 시대에 늦은 게 또 무얼까? 싶다.

나이 마흔이 넘어 나는 작가가 되었다.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나는 이전에 생각지도 못한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인생의 끝은 대입도 취업도 퇴직도 아니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언제나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고 시도할 힘인 것이다. 그리고 사실 그 힘 조차도 내가 줄 수는 없다.

가끔은 그래서 안도하고 그래서 절망하는 것이 아이를 키우는 일 같다. 어쩌지 못하는 것이니 죄책감을 버리자 하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안타까운 순간들이 커가는 사이사이마다 깊은 골을 이뤘다. 그 골마다 감정에 휩쓸려 아이에게 화를 내고 나면 어김없이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아이는 거울처럼 나는 비췄다. 어떤 날은 나란 사람은 엄마가 되지 말았어야 했어.라는 말이 내내 맴돌았다. 폭풍이 지나가고 나서야 내가 할 일이 너를 기다려 주는 것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면 아이는 이내 산을 성큼성큼 오른다.

이제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엄마인 내가 할 일은 그저 버리는 것이다. 욕심을 버리고 죄책감을 버리면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육아의 터널은 아이의 손을 잡고 끌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함께 걷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나는 아이를 키우는 존재보다 지켜보는 존재에 더 가까웠다. 너는 그냥 너로 와서 내게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이지.

부디 머무는 동안 나를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해 주었으면……

아직 다 버리지 못한 후회가 밀려드는 밤이다. 내 어머니의 밤도 그러했으리라. 엄마는 아직도 내가 엄마 때문에 화가가 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그건 그냥 내가 그만큼 간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아가 그때의 엄마를 만날 수 있다면 아무것도 엄마때문이 아니었다고 꼬옥 안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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