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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멜리아 Mar 11. 2018

Next to Normal.

우리의 게이브와 나탈리를 위하여

Next to Normal.

두 번째로 본 뮤지컬. 브로드웨이에 가서 보지는 못했지만, 2015년에 이어서 두 번째로 이 작품을 올려준 교내 뮤지컬 동아리 덕분에 이 작품을 다시 한 번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본 덕에, 저번에는 생각지 못했던 부분까지 생각하게 되었고.




아빠 '댄'은 가족들을 '평범'한 가족으로 만들고싶어하는 강한 소망을 가진 존재다.

그리고 평범한 가족을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엄마, 다이애나다.

다이애나는 조울증과 망상증을 앓고 있었다. 그것도 16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그리고 댄은 그런 다이애나를 '정상'으로 만들기 위해 여러 정신과 의사들을 찾아가서 치료를 받게 한다.


하지만 사실 다이애나가 조울증과 망상증에 시달리게 된 것은 17년 전 장폐색으로 8개월 된 아들을 떠나보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하나 뿐이었던 아들을 떠나보내야했던 그 마음은 어땠을까.

하지만 당시 다이애나를 지켜보던 정신과 의사들은 그렇게 말했다. 4개월 이상 지속되는 슬픔은 병이라고.

그런 다이애나에게는 점점 독한 약물이 처방된다.

극 초반, 왕성한 성욕과 쾌활함을 자랑하던 다이애나는 약물에 지쳐 이렇게 말하게 된다.

슬픔이 느껴지지 않아요. 기쁜 것이나 분노도 잘 안 느껴지고요.  아니, 사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그리고 의사는 드디어 말한다. 환자 상태, 안정.


약물에 지치고 지친 다이애나는 자신이 복용하던 약을 모두 변기에 버려버린다. 그리고 굿맨 부부는 새로운 의사, 파인 박사에게 찾아간다.

다이애나는 파인 박사의 최면 요법을 통해 자신 안에 있던 슬픔을 마주하게 된다.

그 대가는 그녀의 자살기도라는 안타까운 사건으로 이어졌지만.

다이애나가 자살기도를 하자 파인 박사는 전기 충격 요법이라는, 충격적인 방법을 굿맨 부부에게 제안한다.

다이애나는 이를 거부했지만, '정상적인', '평범한' 가정을 만들고 싶은 댄의 노력에 답해주기 위해 결국은 동의서에 사인을 한다.

그리고 그 대가는 그녀의 모든 기억들이었다.


계속해서 연극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놈의 평범함, 정상, 이라는 것은 대체 누가 규정하는 것일까.

다이애나는 파인 박사와 최면 요법을 사용하고 얼마 있지 않아 이런 말을 한다.

8개월 된 아기가 내 품 안에서 서서히 식어갔는데, 거기서 나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아들이 죽고 의사들이 그러더라고요. 4개월 이상 지속되는 슬픔은 병이라고.

하나 뿐인 아들이 죽었는데, 겨우 4개월요.

그리고 나중에, 독한 약물로 인해 어떤 감정도, 감각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을 때 의사가 그제야 내린 판정, 안정 상태.


대체 어떤 것이 '정상'이고 어떤 것이 '비정상'일까?
우리가 느끼는 '평범함'은 진짜 평범함이 맞기는 할까?



정상과 평범함에 대해서, 어떤 정의를 내리는 것이 맞을 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우리는 우리가 가진 과거도 끌어안을 줄 알아야 하고, 또 나의 현재 또한 끌어안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환각 속의 아들 게이브는 우리가 묻어두고 싶어하는 과거의 상처를,

그리고 살아있는 딸, 나탈리는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재를 의미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이애나는 게이브라는 환각을 예뻐하고, 좋아하고, 나탈리의 존재는 그 뒤에 가려두었다.

댄 또한 게이브를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극 마지막에 나오지만, 계속해서 그 사실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가 제대로 인식하고 있고, 가깝다고 생각했던 나탈리도 사실은 그의 손에 쥐고 있지 못했다.

다이애나는 과거의 상처에 압도되어 현재의 자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댄은 다이애나와 같은 과거의 상처를 공유하지만 그걸 계속 거부함으로써 현재 또한 놓치고 말았다.

굿맨 부부가 현재의 자신들을 놓치고 있다는 사실은 나탈리의 피아노 연주회에 가지 못한 것으로 비춰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난 없어'를 외치며 마약에 의존하고, 자신의 일을 완전히 놓아버린 나탈리의 모습으로도.


전기 충격 치료 이후 기억을 잃었던 다이애나는 자신의 기억들을 사진과 물건들로 복기하면서, 결국 다시 게이브를 마주하게 된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과거의 상처, 슬픔을 마주하고, 게이브에게 '넌 8개월짜리 아기였어. 그리고 장폐색으로 죽었지.'라고 하며 게이브를 8개월짜리 아기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 뒤에 나탈리를 안아주며 헨리와 무도회에 갈 수 있도록 배웅해준다.

그리고 스스로 길을 떠난다. 과거의 상처로부터 회복하고, 자신으로서 땅 위에 발을 딛고 살기 위해.

그제서야 그녀는 게이브라는 환각에서 벗어나게 된다.


다이애나가 떠난 뒤 깊은 슬픔에 잠기게 된 댄은, 홀로 남겨져서는 게이브라는 존재를 마주하게 된다.

단 한 번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던 댄은 그제야 아들아, 게이브, 하고 이름을 부른다.

다이애나 덕에 헨리와의 무도회에 무사히 참가했던 나탈리는 집에 돌아와서 어둠 속에 혼자 있는 댄을 위해 집에 불을 켠다.

그리고 댄은 나탈리의 손을 잡는다. 그제서야 게이브는 무대 위에서 사라진다.



우리는 모두 우리만의 게이브와 나탈리가 있다.


중요한 것은 게이브가 자그마한 8개월짜리 아기일 때 그것을 잘 안아주고, 보듬어주는 것이고,

나탈리가 첫 걸음을 뗄 때, 처음으로 남자친구를 만날 때, 처음으로 무도회에 갈 때, 처음으로 자신의 연주회를 가질 때 그 옆에서 잘 격려해주는 것이다.

'평범함'이라는, '정상'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게이브를 거부하거나 그대로 두어 스스로 18살짜리 소년이 될 떄 까지 내버려둔다면 우리는 우리의 나탈리를 손 안에서 잃을 수 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비록 게이브를 마주하는 것이, 자살기도를 했던 다이애나처럼 참을 수 없을 만큼의 아픈 것이라도,

게이브를 똑바로 8개월짜리 아기로 인식할 때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나탈리를 안아줄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다이애나는 극 후반에 나탈리를 안아주며 이렇게 말한다.

평범하지 못해서 미안해.

그리고 나탈리는 그런 다이애나에게 말한다.

평범함은 너무 멀어, 그 근처 어디라면 나는 상관 없어.


어쩌면, 아주 어쩌면,

'평범함'이라는 것은, '정상'이라는 것은, 내가 아닌 타인의 잣대는 아닐까.

그렇다면 나도 완전히 평범하지 않아도 상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 그 근처 어디에서, 8개월짜리 아기 게이브를 안아주고, 적당한 때에 보내주기도 하고, 나의 나탈리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안아줄 수만 있다면.


게이브의 이름을 부를 수 있고, 나탈리의 손을 잡아줄 있는 용기를 가진,

이 세상의 모든 '굿맨'들을 응원하고 싶다.

모든 '굿맨'들의 집에 불이 활짝 켜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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