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품은 고궁, 혼자. 느리게.

경복궁 야간개장 : March 3rd, 2016.

by 아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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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나는 원래 매우 계획적으로 사는 사람이었다. 다이어리에 그 날의 일정을 빼곡하게 적고, 그 일정을 하나하나 해나갈 때마다 형광펜으로 긋고. 하루의 마무리는 내일의 일정과 이번 주의 일정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대학에 왔는데, 세상에는 내 마음대로,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전과 같이 빼곡한 계획 속에서 살아가기에는 존재하는 변수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배운 것이 즉흥이었다. 이걸 지금 하게되면 내일의 계획이, 아니 이번 주의 계획이…. 하고 꼬리를 물고 지나가는 생각을 멈추고 문득 그 당시에 하고 싶은 일을 한 번 해보는 것. 누군가는 '그거 누가 못해?'하고 말하겠지만, 직접 해보면 즉흥적으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즉흥적으로 하지 못해서 기회를 놓친 일들 중에서는 다시 잡을 수 없는 것들도 많았기에, 나는 천천히 즉흥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방법을 깨달아갔다.


 경복궁에 가게된 것은, 그렇게 즉흥적인 일이었다. 사실 티켓 오픈 5분 전에 아는 언니가 톡을 해서, 그제야 야간 개장 티켓팅 시작이 당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낮의 경복궁은 모두에게 열려있지만, 밤의 경복궁은 인터넷으로 티켓팅을 해야 하며 매우 빠르게 매진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빠르게 결정을 내려야 했다.

  5분 내에 같이 갈 사람을 구해서 갈까, 아니면 다음으로 미룰까.

  아니, 그럴게 아니라─혼자 가면 되잖아. 혼자 갈까.

그렇게 약 30초 정도의 고민과 몇 번의 클릭으로, 나와 내 카메라의 첫 행선지는 경복궁으로 정해졌다.



많은 사람들 틈에서 나는 내가 참 운이 좋았음을 깨달았다.


 어둠이 깔린 경복궁을 찾은 사람들은 생각보다도 많았다. 길게 늘어선 줄─그리고 한편으로는 인터넷 에매에 실패해서 현장에서 표를 구할 방법이 없는 찾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참 운이 좋았음을 깨달았다. 즉흥적으로 저지른 일치고는 꽤나 괜찮은 일정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7시, 경복궁의 문이 열렸다. 문을 지나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오게 된 경복궁인만큼, 오늘 하루는 '혼자'인 기분에 빠져, 고궁이 주는 그 정취를 내 마음대로 한번 느껴보자고. 가이드나 설명을 듣거나 읽었던 것들은 모두 잊고 그냥 그 감각과 느낌에 빠져보자고. 그리고는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잔잔한 노래를 틀었다.


어둠 속에서, 도시를 뒤로하고 홀로 빛을 품은 고궁의 모습을 마주함이란.


 나는 또래에 비해서 고궁 같은 곳을 가는 것을 매우 즐기는 편이었다. 물론 체험학습 같은 차원으로 초등학교 때나 중학교 때 간 적도 있지만, 친구들이랑 같이 꽃구경을 하러 간 적도 있고, 그냥 문득 이끌려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와 같은 책을 읽게되어 책을 다 읽고는 가보기도 했다.

 매일, 도시를 마주하고 사는 사람으로서 이를 뒤로하고 도시의 빠른 삶과는 다른 고궁의 한가운데에 있는 느낌은 느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고궁의 정취─장중함과 더불어 그 색채는 얼마나 아름답던가. 아주 천천히, 정문으로 들어가 근정전, 강녕/교태전을 비롯해서 저 구석에 있는 건물들까지 돌고나면 여운처럼 남는 그 '느린 기분'이란 꽤나 기분이 좋다.


밤은 오히려 궁중의 색채를 더해주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날은 '밤'에 찾은 고궁이었기에 조금 특별했을 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언제나 경복궁에 들렀을 때와 같이 궁 구석구석을 돌아다녀보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안전이나 여러 문제로 근정전과 강녕/교태전, 경회루와 같은 주요 건물들을 위주로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 꼭 한 번 가볼만한 가치는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의 불빛을 뒤로하고, 경복궁으로 들어서는 순간 어둠 속에서 홀로 빛을 품은 듯한 그 모습이란. 모든 색을 무채색으로 만들고, 모든 이들을 어둠으로 몰아넣는 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벽이 나타나 그 어둠의 장막을 여리한 손가락으로 걷어내주기를 기다리며 잠을 청하는─밤. 하지만 경복궁의 밤은, 오히려 궁중의 색채를 더해주었을 뿐이었다.


저 자리에 앉았던 이들도 나와 같은 풍경을 느꼈을까.


 근정전에 가까이 가서, 나는 또 한 번 그 내부를 둘러보았다. 몇 번이고 찾았던 경복궁이고, 그렇기에 몇 번이고 보았던 임금의 자리. 그러나 어둠─모든 것들의 거리감을 허물기도 한다는 그 어둠이 깔려서일까, 어쩐지 저 어좌가 가깝게만 느껴졌다.

 조선, 수많은 임금들의 고민과 생각이 지나갔을 저 자리. 저 자리에 앉았던 이들도 밤에 궁을 거닐며 나와 같은 풍경을 바라보았을까. 아니, 같은 풍경으로 느겼을까.


경회루, 아, 경회루!


 근정전을 지나 나는 바로 경회루로 갔다. 많은 사람들이 경복궁 야간개장의 꽃이라고도 한다는 경회루. 경회루의 모습은 그만큼 아름다웠고, 조며을 받은 경회루가 물에 비친 모습이란 더할 나위 없었지만 그런만큼 사람들이 모두 그 앞에 모여 있었기에 천천히 그 기분을 곱씹을 수는 없었다.


돌담 하나도 낭만이다.


 그래서 나는 경회루를 지나 계속해서 걸었다. 저 뒤쪽 자경전은 밤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보고 싶어서 갔으나 그쪽 부근은 막혀있었다. 그래서 걸음을 돌려, 경회루 옆으로 나있는 돌담을 따라 걸으며 궁궐 가장 깊은 곳에 있다는 왕과 왕비의 침전으로 갔다.




 밤, 고궁은 참 낭만적이다. 걸어가면서 눈길이 닿는 곳곳마다 따뜻함과 한편으로는 쓸쓸함이 묻어나있는 그 느낌이란. 고궁에 올 때마다 그냥 지나쳤던 돌담마저도 한껏 운치가 묻어있었다.


교태전 뒤의 아미산. 아미산의 밤은 한적하다.


 그렇게 밤을 휘감고 빛나는 돌담길을 따라 들어간 강녕전과 교태전은 경회루와 달리 한적했다. 철마다 다른 꽃이 피도록 해둔 교태전 뒤편 아미산에는, 지나가는 사람들도 거의 없이 조용히, 그러나 마찬가지로 아름답게 빛을 머금고 있었다. 아직은 겨울의 차가움이 다 벗겨지지 않은 모습. 4월 초 쯤, 꽃이 핀 뒤에 찾아오면 그 얼마나 아름다울까.

 혹시나 야간개장을 갈 사람이 있다면 경회루도 아름답지만 굳이 그 근처에서 사람들 사이에 섞여 힘겨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전해주고싶다. 조금 한적한 강녕전과 교태전도, 충분히 낮에는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모두 둘러보고 나오니, 천천히 걸었는데도 겨우 1시간 조금 넘는 시간이 지나있었다. 고궁의 정취, 의 매력.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었지만 혼자임을, 그 고궁의 느린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던 이 날의 기억이란. 아주 즉흥적으로 떠나, 오로지 카메라와 나의 감정만을 담아서 갔던 경복궁은, 썩 성공적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pictures by Amel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