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또다시 돌아온 토요일. 주말마다 나는 아이와 하루의 일정을 두고 눈치보기와 기싸움에 나선다. 엄마라는 존재에게 집이란 놀거나 쉬는 공간만은 아니라는 사실, 집에서도 끊임없이 엄마를 찾아대는 아이로 인한 피로함, 그리고 소심하게 역마살이 낀 것 같은 개인적 기질의 총합이 나를 꼭 한번은 집 밖으로 나가야 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하루종일 집에 있는 날은 내가 아이에게 부쩍 신경질을 낸다는 것을 확인했다). 외출하지 못하면 에너지가 소진되는 나와 달리 아이는 집에서는 노는 것을 선호한다. 처음에는 유혹하고(핫초코 먹으러 갈까?), 협박을 하다가(그럼 나 혼자 산책해?) 지금은 통보하는 방식(30분 후에 산책할 거야)으로 정착했다.
아이에게 어김없이 산책일정을 통보하고 시간에 맞춰 길을 나섰다. 동네 한 바퀴 돌 셈이었다. 언덕길을 따라 내려가 사직단과 종로도서관을 거쳐 인왕산 둘레길을 통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게 보통의 우리 루트였다. 날이 유독 따뜻했고, 발걸음이 가벼웠다. 보도블럭 위에서 인간말이 되어 게임을 하다 보니 금방 종로도서관 앞에 다다랐다. 광화문 거리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트를 수정하여 종로도서관 앞에서 사직단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와 광화문 큰 거리가 내다보이는 곳에 도착한 순간 저 멀리 깃발들과 사람들이 보였다.
뉴스를 보며 분노를 참지 못하는 나를 지켜보던 아이에게 말했었다.
대통령이 나쁜 짓을 해서 경찰이 체포해야 되는데 대통령이 집에 숨어서 나오지를 않아.
자신이 좋아하는 경찰, 체포라는 단어가 등장해서인지 아이는 흥미를 보였다. 그 이후 종종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대통령은 체포됐어? 라고 물어보던 아이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광화문이 있어 우리 집회에 가볼까? 라고 물은 적도 몇 번 있었다.
집회가 뭐냐고 묻는 다섯 살 아이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원하는 주장을 크게 말하는 거라고 설명해주었다.
예를 들면, 일주일에 4번만 유치원에 가자! 이렇게 외치는 거야.
그럼 나는 그거 할래! 일주일에 4번만 유치원에 가기!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다가 그날은 우주의 기운이 도운 것처럼 모든 상황이 자연스럽게 우리를 그곳으로 떠밀었던 것이다. 차량이 통제되어 한산한 넓은 도로를 옆에 끼고 천천히 인파들이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하나은행이 있는 건물의 커피빈 앞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다시 만난 세계가 흘러나왔다. 이 노래가 21세기의 투쟁가가 되기 전부터 나는 이 노래를 좋아했다. 순정만화 주제곡과 응원곡을 적절히 섞어 놓은 것 같은 멜로디에 뻔하지 않은 가사가 좋았다. 이상하게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이 민망해서 빠르게 훔치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경복궁 담장을 따라 들어가는 골목에 커피와 차, 오뎅 등 음식을 무료로 나눠주는 푸드트럭들이 늘어서 있었다. 학교 급식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건내 주시는 오뎅을 받아 쉼터로 제공된 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를 지그시 보던 아주머니가 아휴 아이랑 같이 힘들어서. 라고 하셨다. 웃으며 매번 보기만 하다가 처음 나왔어요. 라고 답했다.
사실 내게 집회는 이십대 초반 주말의 고정된 일정이었을 만큼 익숙한 것이었다. 2000년대 초반에 대학에 입학해 한 줌 남아있던 학생운동의 언저리에 있었던 흔치 않은 경험을 가진 나에게 집회와 그 문화는 여전히 몸에 새겨진 것처럼 남아있다. 가끔 투쟁가를 흥얼거리거나(단결만이 살 길이요, 노동자가 살 길이요.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투쟁하는 사업장 옆을 지날 때 스피커에서 빵빵한 투쟁가가 흘러나오면 심장이 쿵쿵댄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노조, ~당, ~단체, ~학생회 등의 단체명이 적힌 깃발들과 인사말을 대신하는 “투쟁!”의 외침과 빠질 수 없는 팔뚝질, 심장박동수를 올리는 비장하고 결연한 노래들, 투쟁의 의지를 북돋기 위한 힘찬 발언들이 내가 겪었던, 그리하여 내가 상상하는 집회의 모습이었다.
때문에 2016년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을 규탄하면서 학생들이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복창할 때 나는 생경함을 넘어 혼란을 느꼈다. 저건 (내가 알던) 집회가 아닌데, (내가 알던) 투쟁이 아닌데. 그리고 그해 연말 내내 계속되었던 대규모 촛불집회는 축제라 할만한 것이었다. 나 역시 한번도 집회에 나가본 적 없는 동생을 이끌고 크리스마스 이브를 거리에서 보냈고, 지인 중에 집회는커녕 스스로를 정치무관심층이라 표현하던 사람조차 집회에 나갔노라고 고백하던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그때도 시민들이 이렇게 적극적이고 체계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음식과 따뜻한 음료를, 핫팩과 추위를 피할 장소를 제공하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있었다고 해도 이렇게 조직적이고 대규모는 아니었을 것이다). 경복궁 앞 도로와 공터에 사람들이 자유롭게 앉아 있었다. 우리도 자리를 잡고 앉아 투쟁이라고 외치며 인사하는 씩씩한 대학생과 열일곱살이라고 밝힌 학생, 배달 라이더 노조원이라고 소개하는 청년의 발언을 들었다. 범우주적 카페인 중독자 모임이라고 적힌 깃발을 보며 킥킥댔다. 밴드 허클베리핀과 말로의 공연을 보았다. 한번 나왔을 뿐인데 이렇게 많이 받아도 되나, 황송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믿을 수 없이 평화롭고 다정한 기운이 가득한 집회였다.
그동안 분노와 무기력, 절망에 시달렸던 건 이곳에, 이들과 함께 있지 않아서였음을 알았다. 유대감에서 비롯된 온기가 우리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그날 밤늦게 돌아온 남편에게 나는 밝은 광주를 본 것 같다고 말했다. 오랜만에 내 안의 깊은 곳에 따뜻한 기운이 들어차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일요일, 폭도들이 법원을 공격하는 영상을 보았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경찰과 언론을 공격하고 유리창을 깨 법원에 난입하여 판사를 찾았다. 믿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토요일에 느꼈던 희망이 두려움으로 변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삶을 시작한 이후로 부쩍 두려움과 분노가 많아졌다.
집에 있던 이스라엘 민간인들이 테러당했다는 뉴스를 보고는 우리집에 아이를 숨길만한 공간이 있는지를 물색했다. 한동안 무장한 괴한이 침입하는 망상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복의 외피를 쓰고 팔레스타인을 대상으로 아이, 환자를 가리지 않는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을 때엔 너무 고통스러워서 차마 뉴스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우리나라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고 해도 나와 전혀 무관한 문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 끔찍한 야만 앞에 국제사회라는 게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서 참담했고 무기력했다.
또 한편으로는 산업을 둘러싼 멈추지 않는 욕망들이 기후재앙이 되어 끔찍한 산불과 홍수, 이상기후현상으로 전세계 곳곳을 덮치는 것을 보면서 아이가 살아갈 10년, 20년, 30년 후를 생각하면 두려움에 몸서리가 처진다. 이와중에 극우파시즘을 선동하며 다시 정권을 잡은 미국 대통령은 기후위기를 멈추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시 되돌릴 것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2021년 미국의회 습격사건을 보며 참 미국스럽다고 생각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극우세력의 공개적인 활동무대가 되고 있다. 물론 전조는 있었다. 된장녀에서부터 시작되어 맘충(불가침의 영역이었던 ‘모성‘을 공격하기에 이른), 한녀, 한남, 잼민이, 틀딱, 개근거지 등 재생산되는 혐오의 표현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 극단의 시대에 아이와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
그것도 잘.
되도록 즐겁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