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아직은 모르는 게 너무 많으니까

그로잉맘 세 번째 이야기

by 아멜리 Amelie

* 이 글은 그로잉맘에 게재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집에 있는 책이라고는 백과사전 몇 권이 전부였다. ‘기역’부터 ‘히읗’까지 책장이 닳도록 읽은 터라 책을 꿰맨 실이 너덜너덜해질 정도였다. ‘이응’에서 만난 ‘아이스크림’에는 추억도 있다. 우유와 달걀, 설탕으로 집에서 아이스크림 만드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었고, 그대로 따라 하며 몇 번이나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출판사 외판원을 하셨던 아빠 친구분이 세계 어린이들의 생활을 담은 책 전집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셨다. 그 해 크리스마스만큼 즐거웠던 날이 있었을까. 프랑스와 짐바브웨이, 뉴욕과 티베트 아이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세계지도를 들여다보며 언젠가 세계를 여행하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으니 말이다.


거짓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학교만큼 좋아했던 곳도 없었다. 학교에 가면 도서관도 있고 작은 교실 문고도 있어서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으니까. 학교 다음으로 좋아했던 곳은 같은 아파트 3층에 살았던 봉석이네였다. 봉석이네 거실 한쪽은 모두 책이었다. 어릴 적 우리 동네 사람들은 대문을 활짝 열어 놓고 살았는데 학교 마치고 집에 가서 손발만 씻고 아래층에 내려가 봉석이네 책장을 살피는 게 일이었다. 봉석이 엄마는 그런 나를 예뻐라 하셨고, 책을 읽고 있으면 간식도 내어 주셨다. 처음엔 한 권만 읽고 집에 가야지 하다가 거실에 자리 잡고 앉아 몇 권씩 읽고서야 엄마가 저녁 먹자고 나를 찾는 소리를 듣고서야 아쉬운 마음 뒤로 하고 집으로 향했다.


양쪽 어깨가 참고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던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책은 여전히 함께였다. 방학은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어 기쁘기까지 했던 시간이었고, 동네 서점에 하루 한 번씩 찾아가 책을 구경하고 읽고 아껴둔 용돈으로 책을 사다 날랐다. 시험공부를 하러 구립 도서관에 가서는 책만 읽다 오는 날도 허다했다. 글자가 나를 이끄는 대로 떠나는 글 여행이 좋았고, 그 속에서 끝이 없는 상상을 하는 시간이 행복했다. 이야기를 다 읽고 책장을 덮을 때 마음 한 구석이 울렁이는 느낌, 예전에 떠올리지 못했던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작가가 보여주지 않은 다음 이야기를 상상하는 시간이야말로 책을 통해 얻은 선물 같은 경험이었다.


대학 전공을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 되었고, 의심도 하지 않고 국문과에 갔다. 좋은 직업을 얻을 수 있거나 세상살이에 도움이 되는 공부를 고민하기에는 어렸던 모양인지 좋아하는 책 읽기를 제대로 할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것이라는 순진한 마음에 스스로 내린 선택이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들여다본다. 고객사에서 요청하는 견적서를 작성하고, 프로젝트 규모에 맞게 제대로 예산을 책정했는지 살펴본다. 결과는 모두 숫자로 표기되고, 숫자가 작을수록 성공적일 때도 있고, 숫자가 커야만 좋은 평가를 받을 때도 있다. 문자를 사랑했는데 요즘은 숫자를 더 자주 많이 들여다봐야 한다. 거기다 영어로 말이다. 글은 좋아했지만 외국어에는 큰 매력을 못 느꼈던 터라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영어 공부를 했다. 남들이 다 영어를 잘해야 한다고 했지만 영어가 얼마큼 중요한 지 피부로 느끼지 못했기에 남들 하는 정도로 에너지를 쏟은 과목이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높은 토익 점수를 받기 위해 공부는 했지만 이 토익 점수로 내가 뭘 할 수 있는지도 몰랐고, 이 점수로 대단한 일을 할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세상이 토익 점수를 원해서 어느 정도의 점수를 받고 나서 나 혼자 만족해하며 토익 책을 쓰레기통에 버려버렸다.


큰 아이 얼굴에서 유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순간이 찾아왔을 때 아이에게 물어봤다.

“넌 뭘 할 때 제일 기분이 좋아?”

“난 그림 그리고, 놀이터에서 친구들이랑 놀 때, 음악 들을 때 기분이 좋아.”

“엄마는 뭘 제일 좋아하는 것 같아?”

“엄마는 책을 좋아하지. 그리고 글 쓰는 것도 좋아해.”


나는 책을 좋아하고 글을 쓰는 것도 좋아하지만 그것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말을 못 했다. 나는 수학은 좋아했지만 셈은 느리다고, 경제 관련 공부를 조금 했지만 여전히 환율 변화는 이해하지 못한다고, 영어 공부를 했지만 영어로 일을 하는 건 늘 힘든 일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책을 좋아하지만 책과 관련이 없는 지금 일도 좋아해. 일할 때에는 늘 숫자를 많이 봐야 하는데 셈이 느리고 숫자랑 안 친해서 숫자로 된 내용은 볼 때에는 엄청 눈을 크게 뜨고 보고 또 봐야 해. 엄마는 학교 다닐 때 영어 공부를 많이 안 해서 지금도 영어로 된 글을 읽으면 단어를 찾고 문법을 들여다봐. 어른이 되면 뭐든 저절로 다 알게 되는지 알았는데 아니었어. 모르는 일도 많고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영역도 많아. 세상은 빨리 변하고 새로운 일은 한꺼번에 많이 생겨. 그럴 때마다 하나를 배우고 새로운 생각을 하고 변화를 느끼려 애써. 그렇게 만들어 가는 재미도 원래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할 때만큼이나 크더라.”


어쩌면 나는 학교에서 뭔가를 배우는 아이에게 배움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영역과 잘하는 영역, 하기 싫은 영역과 잘하고 싶은 영역 사이에서 수만 가지 갈등과 고민을 어른들도 하고 있다는 것을 에둘러 전하고 싶었다. 오히려 우리의 배움엔 끝이 없고, 나이가 무거워져도 새로운 즐거움이 샘물처럼 솟아오를 것이라는 기대감을 안겨 주고 싶었다. 이미 다 자랐다고 생각했지만 아이의 성장 속도에 맞춰 다른 방향으로 자라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엄마는 아닐까. 엄마도 아직은 모르는 게 너무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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