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잉맘열한 번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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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소파에 앉아 멍하니 거실 창 너머 건너편 아파트 위 하늘을 바라보고 앉아있었다. 방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방문이 살며시 열린다. 둘째가 남극에 사는 펭귄처럼 걸어 나온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리 없는 함박웃음만 보이며 품에 안긴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아이가 따뜻하다 못해 뜨겁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고 100미터 달리기 선수의 순발력을 발휘해 책꽂이 위에 올려 둔 체온계를 챙겨 왔다. 삑삑 소리를 내고 체온계가 보여준 숫자는 37.8. 심각하진 않지만 안심이 되지 않는 숫자다.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아이와 마주한 시간들을 떠올려본다. 금요일 아침, 아이는 피곤하다며 유치원에 가지 않겠다고 했고, 집에서 온종일 놀았다. 토요일, 공원 놀이터에서 신나게 뛰어다니다가도 아이는 유모차만 타면 어깨를 동그랗게 말고 앉아 있어 지쳐 보였다. 대수롭지 않게 보였던 아이의 모습들을 머릿속에 다시 그리다가 이내 미안해진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아이를 세심하게 들여다보지 못한 것이 꼭 내 잘못 같다.
보리차를 조금 먹이다가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아침에 뭘 먹으면 좋을까? 뭘 먹으면 아픈 것도 금방 낫고 또 밖에 나가서 놀 수 있을까? 미역국 끓여줄까?”
“응! 미역국!”
아이가 웃음으로 화답한다. 쏜살같이 부엌으로 달려가 마른미역을 주섬주섬 꺼내 찬물에 담갔다. 소고기보다는 북어포를 좋아하는 아이를 위해 북어도 조금 불렸다. 마른 북어가 물을 흠뻑 머금은 순간 북어를 잘게 썰고, 불 위에 올려둔 냄비에 참기름을 두르고 다글다글 볶았다. 참기름 냄새와 북어의 고소한 냄새가 섞일 무렵 불려둔 미역을 넣고 국간장을 조금 두르고 다시 다글다글 볶았다. 미역과 북어가 찰랑찰랑 잠길 때까지 물을 붓고 센 불에 한번 끓이고 다진 마늘을 조금 넣고 약한 불에 뭉근하게 끓이기 시작한다. 아이가 먹기에 딱 좋은 간을 맞추고 불을 껐다. 그 사이에 밥이 다 되었다고 전기밥솥 안내 멘트가 나온다. 아이가 좋아하는 배추김치를 쫑쫑 썰고, 미역국의 미역을 먹기 좋게 잘라 국그릇에 담고, 따뜻한 밥 한 그릇을 퍼서 아이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와, 미역국이다. 맛있어. 엄마.”
“그래? 엄마가 끓인 미역국 맛있게 먹어줘서 고마워. 미역국 많이 먹고 어서 낫자.”
딸아이는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콩나물국을 찾고, 아들아이는 미역국을 찾는다. 우리 아이들의 소울푸드다. 나에게도 소울푸드가 있다. 가끔 내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남편이 곧잘 해주는 소울 푸드는 ‘갱시기’라고 부르는 김치 콩나물 죽이다.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학창 시절, 엄마는 일요일이면 갱시기를 끓였다. 멸치 국물을 우려내고 쫑쫑 썬 신김치를 한 움큼 넣고 보글보글 끓이다가, 콩나물을 넣고, 수제비를 뜨고, 식은 밥 한 덩이를 넣고 다시 보글보글 끓이며 간을 맞춘다. 우리 집은 국물 우릴 때 쓰던 멸치를 건져내지 않고 다 먹었다. 살짝 비릿한 듯 담백한 멸치와 신김치와 콩나물과 수제비와 춤추듯 달아나는 밥알들을 한 숟갈 크게 떠서 먹고 국물을 들이켜면 한겨울에도 온몸에 땀이 흘렀다. 속이 시원하면서도 든든한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아이를 임신하고 얼큰한 음식이 먹고 싶을 때, 몸살을 앓고 뭐라도 먹어야 했을 때, 가슴 한구석 먹먹하게 식구들이 보고 싶을 때 생각나는 음식이다. 이 정도라면 나의 소울푸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몸과 마음이 아플 때의 ‘갱시기’는 마음이 먹는 음식이다. 평소보다 여유 있게 자고 일어난 일요일 아침, 온 식구가 머리를 맞대고 둘러앉아 뜨거운 국물을 후후 불어가며 후루룩 마시듯 먹었던 죽 한 그릇, 그 죽 한 그릇을 먹는 동안 식구들과 두런두런 나눴던 이야기들, 땀을 흘리면서 연신 맛있다고 하면 입가에 미소를 띠며 좋아하던 젊은 엄마의 모습이 한꺼번에 떠오른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 고향을 떠나 먹는 갱시기에 어린 시절 밥상에서 느낀 따뜻함과 젊은 부모의 싱그러움과 그들이 보듬어주는 마음이 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생각나는 음식, 그 음식을 먹고 느끼는 기분 좋은 포만감, 음식을 둘러싼 사람들의 즐거움, 이 모든 것이 모두 두고두고 꺼내 먹는 마음의 영양제는 아닐까.
먼 훗날 우리 아이들도 콩나물국과 미역국을 앞에 두고 지금의 우리를 생각하는 날이 올까. 따뜻한 국 한 그릇을 호로록 마시며 마음을 괴롭히는 얽히고설킨 잡생각을 도려내고, 아픈 몸을 회복시킬 힘을 얻을 수 있을까. 하루에도 수시로 부엌을 드나드는 내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영양이 듬뿍 담긴 음식만은 아닐 것이다. 그 음식에는 마음으로 기억하는 순간, 추억들도 있지 않을까. 언젠가 아이들이 제 몸과 마음이 힘든 날, 콩나물국과 미역국을 먹으며 머리를 맞대고 식사를 했던 식구들의 온기와 소소한 일상의 대화들을 추억하고 자기 자신에게 ‘괜찮아, 힘내’라는 말을 해줄 수 있다면 내가 부엌에서 쏟은 열정은 제 할 일을 다 한 게 아닐까 싶다.
오늘을 살아낼 힘과 내일을 위한 위안을 얻는 소울푸드.
여러분의 소울푸드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우리 아이의 소울푸드는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