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원래는 없다

그로잉맘 스물한 번째 이야기

by 아멜리 Amelie

일요일마다 아이들과 남편을 집에 두고 나 혼자 외출하는 일정이 있는데 갑자기 취소가 되었다. 오랜만에 일요일 오후를 아이들과 보내게 된 날이었다. 여유 있게 점심을 먹고 한바탕 설거지 전쟁을 치르고 온갖 잡동사니가 널브러진 거실 끄트머리에 앉아 집안을 바라봤다. 식탁과 소파와 티 테이블이 논에 심은 모처럼 촘촘하게 들어앉아 있는 거실이 답답해 보였다.


올해 2월 이사를 하면서 가구 세팅을 한차례 했고, 지난 5월 코비드로 인해 재택근무와 홈스쿨링이 다시 시작되면서 책상이 필요해 식탁을 거실로 가져왔다. 식탁이 베란다와 가까이 있어서 밖에서 밥을 먹는 느낌이 드는 건 좋지만 주방과 가장 먼 곳에 위치해 있어 밥 한번 먹으려면 각종 장난감과 책더미를 물리치며 식사를 날라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집은 작고 살림살이는 많으니 이 정도 수고로움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새로운 놀이를 궁리하고 있는 큰아이에게 제안했다.

“우리 거실 가구 위치 바꿀까?”

“그럴까? 어떻게 바꿀까? 생각해보자.”

아이는 새로운 놀잇감을 낚아채듯 나의 생각에 동의했고 우리 둘은 곰곰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동조자가 생긴 기쁨에 적극적으로 내 의사를 피력했다.

“식탁이 적어도 거실 가운데에는 있어야 해. 지금은 밥을 가지고 나오는 자체가 모험이잖아. 그리고 소파와 소파 테이블이 베란다 가까이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럼 베란다 밖을 보는 것도 좀 편해지고 공간 분리가 되잖아. 거실이 작긴 하지만 말이야.”

아이는 내 말을 다 이해했다는 듯 제 몸의 몇 배나 되는 무게의 소파 끄트머리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의 가구 위치 바꾸기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부터 나는 여동생과 우리 둘이 쓰는 방의 가구 위치를 직접 바꾸기 시작했다. 책상, 피아노, 침대를 동생과 둘이 밤새 옮기고 방을 쓸고 닦았다. 식구들이 잠든 늦은 밤 주로 가구 위치를 바꿨는데, 아침에 우리 방에 오셨다가 깜짝 놀라는 엄마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닐 정도였다. 나의 눈으로 내가 만든 변화를 바라보면서 뭔가 해냈다는 뿌듯함과 완전히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다는 만족감을 동시에 느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마음에도 새로움이나 변화는 필요했고, 고작 할 수 있는 것이 방 바꾸기 정도가 아녔을까 싶다. 어린 나이에 나의 상황이나 가족을 바꿀 수도 없고, 하고 싶은 일을 하기보다 해야 하는 일을 더 많이 해야 하는 시간들이었으니 방을 바꾸는 것은 내가 내 인생을 만들어 나가겠다는 작은 의지가 투영된 다짐 정도가 아니었을까.


나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시작된 거실 가구 위치 조정 프로젝트였지만 아이들은 신나게 동참했다. 널브러진 장난감들을 한편에 모아 두고, 우리 몸보다 더 큰 가구를 들고 밀어 옮기는 수고도 함께 했다. 아이들은 큰 가구에 다치지 않게 요리조리 잘들 피해 다녔고, 마지막 정리까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야무지게 했다.


청소기를 한바탕 돌리고 나서 아이들과 식탁 의자에 앉아 거실을 바라봤다. 식탁에 앉으면 소파와 테이블이 놓인 거실과 그 너머 베란다가 내다보인다. 같은 공간이지만 예전보다 환해진 느낌이다. 소파에 걸터앉아 베란다를 바라본다. 원래는 식탁 의자 다리들과 식탁에 시선이 먼저 갔는데 눈이 먼저 알고 밖을 향한다. 속이 시원해진다. 소파 팔걸이에 작은 아이가 걸터앉아 책꽂이에서 책을 꺼내어 볼 수 있다. 작은 아이는 그곳에 자주 앉아서 놀 것 같다.


큰 아이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오늘의 가구 옮기기 프로젝트를 정리한다.

“세상에 원래 그런 건 없는 것 같아. 원래 거기 있던 게 없어질 수도 있고, 달라질 수도 있는 거야. 원래 있어야 하는 것도, 없어야 하는 것도 없어. 마음이 달라지면 세상이 달리 보일 수 있고, 세상이 변화면 내 마음을 고쳐 먹어야 하는 순간도 오는 것 같아.”


식탁과 소파 위치 하나 바꾸고 뭐 이렇게 원대하고 심오한 이야기를 하나 싶지만 이런 작은 변화에 즐거워하고 기대하는 사람도 있지만 불편해하거나 귀찮아하는 사람도 있다. 수많은 작은 변화를 하다 보면 큰 변화에 의연해질 수도 있고, 원래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긴 일이 눈앞에 펼쳐질 때 ‘그럴 수 있다’는 여유 있는 눈과 마음으로 그 일을 바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


코비드와 함께 2년을 작은 섬나라와 집에 갇혀 살면서 현미경으로 삶을 바라보는 자세를 배우는 느낌이다. 원래 이러지 않았으나 세상이 바뀌어 하나 얻은 능력이라고 하고 싶다.


세상에 원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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