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인 내가 한없이 부끄러웠던 날

그로잉맘 서른한 번째 이야기

by 아멜리 Amelie

나와 남편은 어쩌다 한번 싸우는 정도로 부부싸움이 잦지 않다. 냉랭한 부부 사이로 인해 집안이 겨울왕국이 되는 걸 못 견뎌서 싸우더라도 자정이 되기 전에 화해하려 애쓴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싸운 적은 거의 없는데 가끔 어떤 주제로 대화를 하다가 목소리가 올라가면 아이들은 우리가 싸우는 줄 알고 ‘STOP(그만)’이라 쓴 종이를 나와 남편 눈앞에 들이민다. 그럴 때면 아이들은 높아지는 목소리 크기, 상대방을 쏘아보듯 날리는 날카로운 눈빛, 두 사람 사이에 급격히 떨어지는 온도를 동물적 감각으로 느끼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지난 주말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식구 모두 갤러리와 놀이터를 찾아다니며 한참을 놀았다. 출장과 잦은 야근으로 너무 피곤했던 탓에 아이들을 따라다니는 게 많이 버거웠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친구 아이의 생일 선물을 고르기 위해 장난감 매장에 들어갔다. 나무로 제작된 작은 장난감 하나를 골라서 남편에게 건네며 결제를 하고 나가자고 했고, 남편은 이 작은 장난감이 비싼 것 아니냐며 다른 곳에 가서 더 둘러보자고 했다. 내 체력은 방전이 되었고 더 이상 돌아다닐 힘이 없었다. 비싼 것 아니냐는 남편의 말에 화가 나서 ‘이 짠돌아’라고 버럭 화를 내고 애들을 모두 데리고 매장을 나와 버렸다.


아이들에게 이제 집에 가야 한다며 씩씩거리고 걷는데 큰 아이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 하나씩 쥐어 주고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아이스크림이 줄줄 녹아 아이들 손에 흐르는 것을 보고서야 잠깐 서서 다 먹고 가자고 했다. 속에는 천불이 났지만 아주 침착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작은 아이가 먹다 만 아이스크림을 나에게 건네며 더 이상 못 먹겠다고 했고, 갑자기 솟구쳐 오르는 내 화를 억누르며 아이스크림 컵을 들고 지하철역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화가 난 건지 피로감이 온몸을 휘두르며 나타나는 감정인 건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지하철역에 다다랐는데 쓰레기통이 보이지 않았다. 지하철 개찰구를 코앞에 뒀는데도 쓰레기통은 없었다. 세상이 꺼지는 듯한 한숨을 쉬고 아이스크림 컵을 바라봤다. 그때 큰 아이가 말을 걸었다.


“엄마, 나 화장실 가고 싶어. 쉬를 해야 해. 나랑 화장실 가는 길에 쓰레기통도 찾아보자. 가자 엄마.”


내 오른손에는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큰 아이의 손이, 왼손에는 아이스크림 컵이 돌덩이처럼 무겁게 매달려 있었고, 쇼핑몰 방향으로 한참을 다시 걸었다. 이윽고 화장실 하나를 발견했고, 돌덩이보다 무겁게 느껴진 아이스크림 컵을 버리고 나니 내 눈을 뿌옇게 뒤덮고 있던 감정의 장막 하나를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가 보였다.


아이는 장난감 가게에서부터 일그러진 내 얼굴을 보고 날카로운 내 목소리를 들으며 직감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엄마랑 아빠가 싸웠다. 엄마가 화가 많이 났다.’

상황을 마주하고 이내 슬프고 무서웠을 것이다.


아이스크림 컵을 버릴 곳을 찾지 못해 짜증이 덕지덕지 묻은 내 얼굴을 보면서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본인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찰나의 순간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그러고는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 있는 나에게 말을 걸기 위해 얼마나 용기를 냈을까. 모든 상황을 다 느끼지만 본인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지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내 눈치만 봤을 아이를 생각하니 미안함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나를 포함한 어른들은 아주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과하게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이고 감정만 앞세워 행동한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어려서 잘 모르고, 어리니 몰라도 된다고 생각해버린다.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이런 상황을 마주하고 혼자 속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할까.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아이도 나도 너무 지친 나머지 서로의 어깨를 베개 삼아 기대어 앉아 잠을 청했다. 아이의 작은 손을 만지작거리며 미안하다고 속삭였는데 아이가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오늘, 아이와 차근차근 그날의 장난감 가게와 아이스크림과 화장실 이야기를 하며 사과했다. 엄마가 많이 부족하고 너그럽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고, 아이는 내 눈을 진하게 바라보더니 활짝 웃어줬다.


이런 실수를 다시 하지 않기 위해 오늘 아이가 전해준 눈빛과 웃음을 내 마음에 새겨둘 것이다. 나보다 훨씬 어른인 여덟 살 아이를 꼭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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