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잉맘 서른두 번째 이야기
지난해 겨울 한국을 다녀오며 교과서 내용을 그대로 담은 2학년 1학기 국어책을 한 권 사 왔다. 큰 어린이와 일주일에 두 번 나란히 앉아 그 책으로 국어 공부를 한다. 기본 모음과 자음을 자신 있게 읽을 수 있게 된 아이는 이중 모음과 된소리, 받침 글자를 익히기 시작했다.
해외에 살아서 영어를 큰 어려움 없이 배울 수 있다는 이점이 있지만 한국어를 따로 가르쳐야 하는 어려운 숙제가 있다. 집에서 한국어로 대화를 하려 애쓰지만 주제와 내용이 뻔하다.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한국어로 이야기할 수 있도록 질문을 하지만 대답할 내용이 길어지고 복잡할수록 아이는 영어의 세상으로 도망쳐 버리기 일쑤다.
아이를 직접 가르치는 게 얼마나 고된 일인지 엄마들은 잘 안다. 엄마가 독단적으로 공부 계획을 세우지 않았음에도 아이는 엄마가 시키는 것을 억지로 하는 것처럼 비협조적 태도를 취한다. 어려운 문제가 나오면 집중은커녕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배배 꼬다가 느닷없이 다른 책이나 장난감을 가지러 가거나 맥락 없는 소리를 하며 도망치려 한다. 그러다 한소리를 들으면 입술이 툭 튀어나와 왜 한국어 공부를 해야 하냐는 둥, 공부를 너무 많이 하는 것 같다는 둥 화살을 엄마인 나에게 돌린다.
사실 엄마인 나에게도 아이를 가르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두 장을 같이 공부하기로 했는데 어떤 날은 아이가 곧잘 따라오면 세 장을 해보자고 꼬드겨본다. 꼬드김에 아이가 안 넘어가면 괜히 아이한테 이것도 더 못하냐며 핀잔을 준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아이가 알아듣지 못하는 날은 또 어떤가. 이런 날은 우리가 전생에 어떤 인연이었기에 이 생에서 이토록 힘든 엄마 자식으로 태어났을까 한탄하게 된다.
아이들의 초등학교 국어는 내가 직접 봐주겠다는 마음을 먹고 보니 앞으로 십 년을 더 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십 년이라는 시간을 헤아린 어느 날 저녁, 내 마음이 십 년 앞서 늙었다. 국어책을 보는 것도, 아이를 가르치는 일도 내가 더 좋아해서 시작한 일이지만 어렵지 않고 순탄하기만 한 시간도 아니기에 십 년이라는 시간이 짧게 느껴지지 않았다. 특히 아이의 학습 문제는 언제나 어렵다. 지금 이렇게 시작해도 좋은 것인지, 아이도 원하는 것인지, 아이가 원하지 않아도 해야 할 시점이라고 엄마인 내가 판단하면 해야 하는 것인지 정답이 없는 질문들 앞에서 나는 방황하기 일쑤였고 급기야 내 머리가 먼저 아프기 때문이다.
한국어는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무너져도 배워야 하는, 물러설 수 없는 영역이라고 두통이 심해지기 전에 서둘러 정리했다. 그리고 내 눈앞에 펼쳐질 십 년을 바라본다. 하루만 지나도 아이들은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니까 십 년도 금방 갈 거라고 생각하는 순간 온 마음이 아찔해졌다. 그럼 내 십 년은? 내 나이 앞자리 숫자가 하나 바뀌는데 나의 십 년은 반드시 해야 한다고 정한 것을 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나? 아이들이 한국어를 어느 정도 하게 되면 가르쳐야 할 것을 기필코 가르쳤다는 안도감, 큰 숙제 하나를 했다는 뿌듯함 정도가 남을 것 같은데 그걸로 내 십 년을 갈음할 수 있을까?
그래서 다짐 하나를 추가했다. 아이들의 한국어 공부에 대한 나의 책무를 다 하고 나면 십 년이 흐른 그때 내 공부를 시작할 것이다. 늦은 나이에 학위를 따는 공부를 할 수도 있고, 혼자 공부 계획을 세우고 책을 읽고 강연을 듣고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아이들에게 손이 덜 가는 시간이 오면, 아이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 시간이 줄어들면, 그 시간만큼 나도 나의 학습 성장에 힘을 더 쏟기로 말이다. 내 키는 이미 멈췄고, 성장 곡선은 이미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고, 노화 곡선은 하늘을 향하겠지만 나의 마음과 정신은 아직도 자라고 싶어 한다. 아이들이 배우며 자라는 속도를 따라가진 못하더라도 나의 속도에 맞춰 마음과 정신을 키우는 일에 정진하고 싶다.
이런 내 마음을 아이들이 알아차려서 나와 함께 하는 국어 시간에 바짝 집중해주길, 10년을 9년으로 한해만 당겨도 내가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늘어날 테니 말이다. 아, 이것도 욕심이다. 계획한 시간대로만 해도 우린 잘 해낸 거다. 오늘 책 한쪽에 담은 우리의 노력을 믿으며 계속 나아간다. 어디로 어떻게 가서 닿을지 모르는 우리의 미래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