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상의 힘

우리는 언제 떠나고 싶어할까

호주에서 만난 지평선과 남극해

by 아멜리 Amelie

달콤한 밤잠을 위해 치르는 의식이 있다. 세 식구가 고요히 기도를 마치고 부스럭거리며 자신의 공간을 찾아 눕는다. 다시 한번 잘 자라는 인사를 입말로 나누고 가장 편안한 자세를 취한 후 눈을 감고 뇌의 스위치를 끌 준비를 한다. PC 바탕화면에 흩어져 있는 파일 정리하듯 뇌를 청소하는 시간이 이 순간이다. 거창할 것까진 없지만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하루의 시작이 있었으니 끝이 있고, 이 끝 뒤에 따라올 시작이 평안하려면 이 순간의 끝이 진정한 의미의 끝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매일 밤 잠들기 전, 나는 푸르른 들판을 떠올린다. 경험과 기억에 따라 푸르른 들판의 모습은 매일 달라진다. 강원도의 양 떼 목장이나 고창 청보리밭, 보성 녹차밭을 걷고 있는 나의 발을 내려다보는 상상을 한다. 기분이 차분한 날은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새하얀 실내화를 닮은 단화를 신은 발을 떠올리고, 기분이 가라앉는 날은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며 흙냄새가 훅 올라오는 푸르른 들판을 그린다. 발을 내려다보는 상상이기에 우산은 필요도 없고, 그저 발가락에 흙이 닿는 느낌이 어렴풋이 느껴질 정도의 맨발로 노니는 광경을 그린다.


음악으로 말하면 데미안 라이스의 Older Chests 같은 느낌이다. 손 끝에 바람이 닿는 듯, 흙 부스러기가 발가락을 간지럽힌 듯, 시야를 가릴 정도로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하늘에 떠 있는 무지개를 바라보듯, 나무와 바람과 흙의 냄새가 피부로도 느껴지는 듯, 그렇게 자연을 몸으로 만나는 느낌.


데미안 라이스 <Older Chests>


어느 순간부터 자연에 집착했다. 하늘, 바람, 풀, 물, 햇볕, 공기, 비, 나무, 꽃, 흙은 제자리에 고요히 머물러 있기만 해도 나에겐 한없는 감동이었다. 너무 멀리 떠나지 않아도, 서울만 벗어나도 자연을 만날 수는 있지만, 아주 가끔 멀리 숨어 있는 자연을 만나고 싶을 때가 있다. 사방의 짙은 녹음이 병풍처럼 에워싸는 자연에 푹 안기고 싶을 때, 카멜레온처럼 나뭇잎을 닮은 초록색으로 변해 숲 속에서 흔적 조차 드러나지 않기를 바랄 때, 마음이 온통 먹물처럼 까맣게 타 푸르른 색으로 갈아입혀 주고 싶을 때가 있다. 그건 아주 멀리 있는 자연을 만나러 떠나고 싶다는 욕망이 손안에 작은 돌멩이처럼 만져지는 때이다. 가끔 그렇게 멀리 떠나고 싶었고, 떠날 수 없어 아쉬웠고, 떠날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기도 했다.


호주로 여행을 떠난다고 했을 때, 맨 처음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별이었다. 호주 사막 한가운데에 혼자 덩그러니 있다는 울룰루를 향했던 길에서 만났던 하늘을 빼곡히 채운 별. 자로 그어 놓은 듯 반듯한 지평선 바로 위에서부터 내 머리 위까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자리에 서서 뱅뱅 돌면 별과 별이 만나 선을 그어 땅따먹기를 해도 좋을 별 따먹기 게임판이 되었다. 책에서 만났던 별자리는 '내가 여기 있소'하듯 경쾌하게 반짝거렸다. 신이 있다면 신이 그려놓은 그대로의 자연이 숨은 곳이 호주였다. 누가 건드리지 마라고 한마디 한 것처럼 호주에 있는 돌과 나무와 별은 자리를 지키는 것이 그들의 임무인 양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멜버른과 시드니를 다녀왔다. 시드니는 18년 만에 다시 찾았는데 어디가 어디인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오페라하우스와 보타닉 가든, NSW 도서관, 시청 정도는 머릿속에서 다시 꺼낼 수 있었지만, 그 외 대부분의 길과 건물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시드니는 서울처럼 사람이 만든 '도시'라는 느낌이 강한 곳이어다. 과거에도 그 정도였던 것 같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허물고, 짓고, 채우고, 그려낸 도시라는 느낌. 어쩌면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나에게 시드니는 서울의 외피를 느끼게 한 곳인지도 모른다.


멜버른과 빅토리아주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도시 전체에서 거대한 빌딩이 어색한 모습으로 섬처럼 동떨어져 있는 곳, 건물 한 채가 과거와 미래를 같이 지니고 있는 곳, 외곽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자연에 가까이 다가가는 곳이었다. 시간이 머물러 있고, 자연에 다가간다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매력을 가진 곳이라 감탄했다. 특히 푸르름도 있지만 오묘한 바다가 있어서 그 느낌은 더했다. 남극의 물을 담은 바다, 호주 남쪽 바다의 매력은 거기 있었다. 다른 곳보다 조금 더 차갑고, 더 무겁고, 더 진한 파랑을 가진 바다. 아시아 휴양지 바다들의 색들도 어여쁘지만 속살을 다 드러내고 '날 좀 보세요' 하는 느낌이어서 가벼워 보였다면 남극해는 추를 하나 매단 듯 묵직함이 있어서 오히려 편안했다.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마음에도 납으로 만든 추를 하나 매단 듯 붕 뜨던 마음이 땅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필립 아일랜드에서 만난 바다


예전에 여행을 하면서 자연을 대하던 나의 태도와 마음은 어땠을까? 지금은 나무만 바라봐도 웃음이 터지고, 머리를 젖히고 하늘만 바라봐도 근심이 사라지고, 햇살 좋은 벤치에 앉아만 있어도 행복한 마음이 비눗방울처럼 떠오른다. 길지 않은 시간 살아보니 변함없이 곁에 있는 것이 자연이라는 생각에 다다른 것 같다. 반면에 호떡 뒤집 듯 뒤집을 수 있는 게 사람 마음이다. 마음이 바뀌면 태도도 달라지고 감정의 온도도 격하게 올라가거나 내려간다. 한결같음이 의미하는 것은 뭘까? 감정의 고저가 그리 차이 나지 않아, 감정 변화가 없는 상황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 오히려 감정과 체력의 고저에 충실하게 움직이는 것은 아닐까. 마치 태풍이 불어닥치는 바다는 사납고, 미풍이 부는 바다는 고요한 것처럼 말이다. 대신 어제고 오늘도 내일도, 늘 거기 있는 것은 아닐까. 바람이 불어도, 비가 쏟아져도, 추위가 몰려와도, 더위가 기승을 부려도 거기 있는 것. 나도 늘 누군가에게 거기 있는 사람이고 싶은 가 보다. 내가 한달음에 달려가 바라보고 위안을 얻듯, 누군가에게 나도 그렇게 찾아와 바라보고 눈을 맞추며 마음의 안정을 주는 사람이고 싶은 가 보다.


여행을 다녀오며 마음 한자락에 추를 달고 왔다. 봄바람에 마음이 둥둥 떠다니지 않고, 제 자리에 고요히 앉아있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일상이 노상 흔들릴 때, 세상을 보는 눈도, 세상에 원하는 바도, 심지어 나에게 원하는 바도 덩달아 흔들리는 것을 느꼈던 때가 있다. 일상이라는 집이 붉은 벽돌로 기초공사를 해서 쉽사리 흔들리지 않을 때, 정원도 가꿀 수 있고, 오래된 담도 고칠 수 있고, 지붕에 쌓인 나뭇잎도 수시로 치워가듯 세상살이를 정돈해가며 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마음을 붕붕 떠다니도록 놔두기엔 가진 시간 속에 해야할 일들이 너무 많다. 떠다니는 마음 잡으려 시간을 보내다보면 정작 하고싶었던 일에 공 들일 시간이 부족하거나, 해야하는 일을 해낼 체력이 약해지는 경우를 경험하곤 한다.


언젠가 햇볕에 부풀어진 마음이 시도때도 없이 붕붕 떠올라 하늘을 훨훨 날아가고 싶다고 부르짖으면, 호주 남극해를 떠올려봐야지. 묵직한 파랑으로 해결되지 않고 마음이 하염없이 날아다니면 그 때 다시 떠나야지.


* 오늘 양평을 다녀왔다. 봄이 깊숙히 들어와 자리잡고 있었다. 초록빛을 뽐내기 시작한 나무가 어린애마냥 쑥스러워했고, 맨살에 닿는 햇볕은 이불솜마냥 몽실거렸다. 차를 타고 다니는 내내 웃었다. 만물이 다시 태어나고 있는 걸 보고 있어서 행복했다. 어여쁜 시절이 다가온다. 온 세상이 푸르르게 자라나는 시간이 코 앞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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