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시작하지 못한 나에게

마흔의 첫 해, 시작 대신 한 장을 고르다.

by 시소

이번 새해의 시작을
나는 아직 시작하지 못했다.


아직도 365일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저 기도할 뿐이다.


벌써 두 달이 지나간다.
이제 300일 남짓.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올해도 무엇인가를

'시작'하려 하는 걸까.





어릴 적부터 나는

이런 말을 자주 들었다.


“시작은 하는데 마무리를 안 해.”

“끈기가 없어.”

“끝까지 하는 걸 못 봤다.”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며

그런 아이라 여기며 살아왔다.


시작과 성취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라 믿었고,

시작하지 않으면

성취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좋은 사람이고 잘된 사람이라면

시작과 동시에 마무리도 잘해야 한다는

고정관념도 생겼다.


그래서 나는

착실한 사람,

무언가 한 가지를 지긋이 하는

단단한 사람이 되어야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흔이 된 첫 해.


나는 분명히
이전과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느낌이 떠나지 않는다.


신체적인 아픔으로

걷는 것조차 되지 않던 시간이

또다시 나를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30대의 마지막을 치열하게 살았고,

이제 다시 오는 40대를

똑같이 살면

버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도

“40이 되면 어때요?”라고 묻고,

그 답을 모으며
나의 40을 기대하기도 했다.


그래서.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용납이 쉽지 않다.




첫째 아이는

자신이 태어났을 때의 순간을

자주 묻는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면

그 아이는 황홀해하며

스스로 대견해한다.


나 또한

그 시간으로 돌아가

출산의 고통은 잠시 잊은 채

그때의 방의 온도, 공기

기쁨을 다시 느끼고 온다.


그러다 문득,


미친 듯이 달려왔던 시간의 선택들과

달콤했던 욕망들이

새해라는 이름 앞에서

눈에 자꾸 아른 거린다.


목 넘김이 불편한 알약처럼

여유라는 시간을 억지로

삼켜야 하는 것 같아 괴로웠다.


그때 떠오른 말이 '정돈'이었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

가장 먼저 '정돈'을 받는 것처럼.


9달의 시간은 닦임 받고,
낯선 공간의 웅장함에 울고

양수 없이 공기의 소리를

직각으로 듣게 되며
자신보다 훨씬 큰 세계를
마주하는 그 순간.


아무것도 쥐지 못한 채

작은 손을 꼭 움켜쥔 채

버틸 때의 그 정돈.


그리고

자신이 9달 동안 익숙했던 향과 소리를 가진

엄마를 실제로 만나며

조금씩 울음이 잦아드는 시간.


그 정돈이

지금 나에게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을 떠나는 죽음 또한

누군가의 정돈을 받는다.


한 다큐 속 장의사는

다시는 없을 순간이라 여기며

마치 그가 아직 곁에 있는 것처럼

정성을 다해 대신 정돈을 한다고 했다.


하나,
하나.


그리고 남은 사람들 또한

각자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정돈한다.


그건 그 정돈을 하는 사람만 알고 있다.




그렇다면

태어남의 정돈과 닮아 있고,

죽음의 보다는 훨씬 이른.

지금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는
어떤 정돈이 필요할까.


아직 살아가고 있기에

가능한 정돈.


'책장(冊張, Pages of a book)'


낱장의 책장이 보여

한 권의 책이 돼 듯,


나는 그 한 장 한 장을

정돈이라 생각해 보려 한다.


두려움 속에서도

아무것도 잡지 않은 손을 꼭 쥐고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실제로 마주해 보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서.





나는 말장난을 참 좋아한다.


책을 꽂는 책장(冊欌)이 아니라

책을 이루는 낱장의 장(冊張).


누군가의 책장(冊張)을

들여다보는 일이

어쩌면 나에게도 필요했는지 모른다.

한 장씩 한 장씩.
태어날 때의 정돈과 닮은 마음으로.



** 당신의 정돈은 무엇인가요?


살아있는 자의 정돈은 어쩌면 스스로 건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을 우리가 믿는 어떤 마음 하나로

조심스럽게 만나보는 일.


그 마음을 한 장, 한 장 써 내려가다 보면

언젠가 한 권이 되어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생각하며 오늘은 저도 조용히 잠들어보려 합니다.


평안한 밤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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