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에 우리를 남겨두었다
You can't control outcomes, but you do control your routine. Your food. Your attention. Your tone. Start there. Master those. The person who controls the controllables wins more than the one who obsesses over what ifs.
결과를 통제할 수는 없지만, 당신은 루틴을 통제할 수 있어요.
당신이 먹는 음식, 당신이 집중하는것, 당신의 말투.
그것부터 시작하세요. 그것들을 마스터하세요.
‘통제할 수 있는 것’을 다스리는 사람이 ‘만약에’를 붙잡고 사는 사람보다 더 멀리 갑니다.
다 안다고 생각했다. 그토록 오래 살았고 모든것이 너무나 당연했으니까
떠나지 않았던 사람이고 싶었다. 단 한순간도 이 동네를 떠난적이 없었노라고,
매일 중국어로 된 드라마를 보며, 중국노래를 들으며 단 한번도 떠나지 않았던 사람처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고 얘기하고 싶었다. 내가 의도해서 떠난게 아니니 난 떠난게 아니라고
일주일의 시간동안 나의 동네, 왕징만 수도없이 걸었다...갔던길을 또 걷고 돌고 돌았다
내 집이 있었는데 없어졌고, 내 사람들이 있었는데 없어졌다...
코로나와 함께 나의 모든것이 함께 사라져버렸다.......
그랬다 코로나는 세계의 시간만 멈춘게 아니었다. 내 모든 추억을 함께 가지고 사라졌다.
출발할때부터 뭔가 부족했다. 유심도 없이 비행기를 탔다. 미국비자에 찍힌 여권을 내밀땐 내심 심장이 파르르떨렸다. 한참을 내 여권을 들고 찡챠(경찰)두명이 나타날때까지도 입국이 안되어 망했나 했다.
처음 중국에 들어왔을때도 그랬다. 찡챠들이 막 어딘가에 전화하고 한참 후에나 입국시켜줬었다. 회사에서 4년 확정을 받자마자 이런상황이 싫어 항상 오토 이미그레이션을 등록해 편하게 셔두우공항에 들어갔었는데, 더이상 나의 비자는 오토 이미그레이션을 허락하지 않는 신분이었고 난 오만가지 생각을 떠올리며 기다려야했다
드디어 입국허락이 떨어지고 너무나도 익숙한 셔두우 공항 셔틀을 기다렸다.
집에 돌아갈 것같은 설레임 너무나 익숙한 장소와 변하지 않은 모습들.
여전히 옷에 테이프를 붙여가며 검사를 하고, 역시나 에스컬레이터 한쪽은 망가졌다.
공항에서 만든 3일짜리 유심을 끼우고 다쳐(택시)를 불렀다. 그리고 지하로 내려가고서 풍겨지는 담배냄새에 아 베이징에 왔구나 실감했다. 그래 항상 오빠가 데릴러와서 여기까지도 잘 안내려왔는데 하면서 택시를 기다렸다. 너무 오랫만에 내뱉는 중국어는 중국어를 처음배울때보다 못했다.
你的衣服颜色是什么?(너 옷색깔 뭐야?)에 갈색이 생각이 안났다... 갈색이 뭐더라....학교 다닐때 컬러를 제일 먼저 알아서 열심히 말했었는데..갈색이 뭐더라... 겨우 택시아저씨를 만나고서 아저씨가 棕色(갈색)이라고 할때 맞네..종써네...하면서 말을 잊어버린 시간이 이렇게나 되었네 라고 중얼거렸다.
21년 3월에 중국에서 출국 후 25년 3월...4년이 걸렸다. 4년동안 중국어를 듣기만 하고 말을 잘 하지 않았더니 그새 그냥 아는 말이 되어버렸다. 역시 말을 내뱉어야 내것이구나 느꼈다.
택시는 정신없이 나를 왕징으로 데려다 주었다. 여지없었다. 똑같았다. 내가 살던 아파트, 자주 먹고 마시던 소호, 집앞 화리엔 모든게 그대로였다. 나만 우리만 그곳에 없었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방에 들어가니 옛 우리집이 보이는 뷰를 주었다.. 저기 大西洋新城 605-2601(따시양신청 료우링우 알료링야오) 내가 처음 배웠던 중국어였다. 우리가 4년을 웃었던 울었던 행복했건 기뻤던 아팠던 우리집....중국이라는 나라에 가는거 자체가 인생의 큰 모험이자 전환점이었는데 그 중심에는 우리집 대서양 605동 2601이 있었다. 우리의 이야기가 가득 넘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너무 다 기억이 나는 곳.
이삿짐이 들어오기전부터 나츠가 고양이별로 돌아가버리고 어학당을 다니다 그만두고 하루가 입에 대상포진이 생기고 마카롱을 굽고 비닐장막을 설치하고 허리디스크가 터지고 백설아줌마를 만나고 집이 팔리고 우리가 이사하는 그 모든 이야기가.. 호텔에서 바라보는 우리집을 보면서 한동안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제야.. 아.. 우리가 이곳을 떠났다는게 실감이 되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사했으면서도
난 항상 베이징 왕징 대서양 우리집에 있었다
왕징은 그렇게 나를 키웠다. 하오더 이 한마디에도 중국어 잘한다며 칭찬해주고, 그지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주고, 그 시간들이 모여 리시엔을 만났을때 내 중국어는 확 늘었다. 눈으로 보는 중국어도 더이상 피곤하지 않았고, 중국인들 사이에 있어도 그들의 성조가 시끄럽지않게 되었다. 말하는건 여전히 어렵지만 뭔가 하고싶은 말이 있을때 중국어가 가장 먼저 생각나게되었다. 하나의 아이를 키울때 온 동네가 도와야한다는 그말의 저변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집이 있었는데 없어서 슬프지만 모든것은 그대로인데 우리만 없어서 안타깝지만 이렇게 시간을 곰씹을 수 있어서 기뻤다. 푸른잎이 나오지않아 앙상함은 곧 풍성해져 그늘을 만들테고 봄의 바람은 꽃망울을 터트릴테지 대서양의 3월26일 2025년은 살랑이는 봄이었다 우리의 5년의 이야기가 잔뜩 쌓여있는 곳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는 꿈속의 풍경은 실제로 보는 것엔 비할 수 없더라.. 생눈으로 실제를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막힘도 없는 현실이었다 오빠가 더 보고싶던 하나아루츠키가 더 생각났던 대서양 605동 그리고 503동 - 베이징 여행 첫째날에 쓴 글
실은 베이징에 계속 가고싶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베이징이 그립기도 했고, 음식도 먹고 싶고 가고싶은 곳도 많았지만 빨리가야했던 가장 큰 이유는 용허궁에 아키를 기도해주러 가고 싶었다. 하루도 나츠도 뛰어노는 그 베이징에 아키도 함께 묻고 기도해주고 싶었다. 셋이서 베이징에서 뛰어놀면 언제든 오빠와 나는 만나러 가면되니까.. 내 아가들을 정성스레 품어줄 곳인걸 아니까..
我回到北京了 어쩌면 나는 이번 베이징행의 가장 큰 이유는 용허궁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하루와 나츠를 기도하던 곳에 아키도 함께 평안이 깃들길 바랬다 어쩌면 이 기도는 나에게 계속 해결하지못한 숙제같았다. 1월 31일 아키를 보내고 다시 품에 안은날 아키와 함께 기도하려 도착한 용허궁은 굳게 닫혀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언제 오픈할지 예상할 수 팻말이 붙어있었다 언제를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란건 사람을 참으로 무기력하게 만들더라. 코로나로 인해 우리도 베이징도 전 세계도 많은 것들이 달라지고 변했다. 어이없이 계속 베이징 행을 욕심냈던 이유가 가슴 속엔 항상 아키를 함께 이 곳이 뭍어야한다는 그 미안함과 속상함 슬픔의 遗憾들이 모여있었다. 아픈 손가락이었던 작지만 사랑스러운 아키를 혼자만 방치하는 느낌이 맘 속에 응어리가 되었었나보다. 가장 큰 이유는 아키였던 것같다 혼자 남겨져 아키를 들쳐업고 병원으로 달렸던, 결국 내가 먼저 손을 놓았던.. 그 자책과 후회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을 난 용허궁에 내려놓고 싶었던것같다. 오빠랑 나츠를 기도해주러 갔던 그날부터 하루를 뭍고 아키를 보내기까지 우리에겐 너무 오랜시간이 걸렸다 셋이서 잘 놀고있어 내 하나아루츠키 - 베이징 여행 둘째날에 쓴 글
내삶은 하루와나츠 아키를 만나고 결혼을 한 전후로 많은게 달라졌다. 내편이 없다고 생각할때 고양이들을 만났고 또 그 아이들로 인해 결혼을하면서 안정감이란걸 처음 느껴보았다. 그리고 베이징은 우리의 안정감에 행복 그리고 가족이라는 단어가 가진 진정한 가치를 알게해주었다. 나에게 가족은 태어나면서 생긴 당연한 것이었던 중요하지 않게 느꼈던 삶에서 지키고 보호하고 챙겨야하는 소중함으로 바뀌어있었다. 이 아이들을 지키려고 우리가 얼마나 많은 노력과 방법을 강구했는지, 남편이 내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를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생각해보면 너무나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어색했다 계속 살았던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는걸 얘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오랫만에 해서 말도 잘 안나오는데도 어색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치만 알겠지... 이제 여기에 살지 않는다는걸. 그 간극이 느껴져서 슬프고 아쉬웠다. 다시 이곳에 돌아올 수 있을까? 아니 못오겠지. 아니 어쩌면 나는 우리의 그 시간들을 되감고 싶은건지도 몰랐다.
내 하나아루츠키가 반겨주는 우리집에서 남편을 기다리며 된장찌개를 끓이고 음식도 잘 못하면서 네이버를 뒤져가면서 식사를 준비했던, 처음 살아보는 해외생활이 신기해서 아줌마에게 고양이들을 맡기고 베이징 곳곳을 돌며 유랑하던, 처음으로 자유라는 이름을 가져보았던 그 설레임과 서바이벌로 살아낸 그 순간들이 다시 돌아오지 못할걸 알아서..더 티내고 싶지 않아서.. 어색해하고 싶지 않았다.
겪어보기전까진 몰라 추울줄 알았는데 따뜻했고, 달기만 할줄 알았는데 바삭했어. 21년 3월 홀로 베이징을 도망치며 속삭였다. 분명 도망치는 와중이었는데도 베이징에 남을 수 있는 사람이 부럽다고 아무도 남아있지않은 베이징이 나에게 무슨의미일까, 그래도 베이징에 남아있는 사람이 제일 부러워. 오늘도 띠띠를 부르고 공항 시큐리티를 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역시나 그랬다. 베이징에 사는 사람들이 부럽다 누군가 이토록 좋아하는 도시에 사는 그들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르겠지?
你还记得吗?
我还记得我们灿烂的春天。
-베이징을 오가며 적은 글 중
나의 방황은 그렇게 종료가 되었다. 36살의 나는 45살이 되었고, 중국이 아닌 미국에 있고,
또 이제 어디로 정착할지 고민하는 계절이 왔다. 베이징처럼 또 이렇게 맘깊이 사랑하는 도시를 만날 수 있을까?
다음엔 남편이랑 손 잡고 용허궁에 가야지
그땐 둘이서 오래오래 베이징에서 지내다 왔음 좋겠다.
내가 어디서 놀았냐면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