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미국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건 당신에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남아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일인데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어떤 이들은 이혼을 겪고, 어떤 이들은 아마도 파산을 했을 수도 있어요. 과거에 굉장히 안 좋은 일을 겪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지난 간 일은 지나간 일이에요 과거의 일일 뿐이죠. 과거의 일에만 집중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당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이것을 소비하는 겁니다. 바로 지금이요 시간은 절대 멈추지 않아요 이게 우리가 가진 전부잖아요. 과거에 벌어졌던 일만 생각하면서 지금의 시간을 보낸다면 당신의 미래는 당신의 과거와 완전히 똑같아질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면서 실수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찐한 더위가 가득이던 2022년 여름날, 이사 준비에 한창인 나를 물끄러미 보던 남편이 한마디 던졌다.
미국 갈 준비 해
응? 네? 모라고요?? 미국?? 갑분?? 저 작년에 한국에 들어왔는데요....(우리 이사도 하잖아!)
응 나도
남편이 21년 중국 베이징 주재원을 마치고 들어와 새로운 팀으로 옮기게 되면서 업무에 좀 적응하나 싶었는데 갑자기 미국이라니 어안이 벙벙했다. 남편의 성격상 무슨 일을 할 때(시어머니 용돈마저도 미리 양해 구하는 타입) 꼭 나와 상의하거나 미리 언질 해주는 성격인데 이번 일은 통보해주었기 때문에 어떻게 된 일인지도 궁금했다.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말했으면 가지 말자고 하려고 했어?
아니 당연히 가라고 했지
거봐 그럴 줄 알았어
우리의 대화는 간단하고 명료했다. 이미 서로를 너무 잘 아는 10년차 부부이다. 그후 왜 상의없이 혼자결정하게 되었는지 알려주고 이해시켜주긴 했다. 확정받기까지 일주일동안 말 못하고 끙끙댔을걸 생각하면 안쓰럽기도하고. 그렇게 삶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으면서 미국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23년 3월, 난 23년 7~9월을 출국 예정으로 남은 시간 미국 갈 준비를 차근차근해보기로 했다. 내 인생에 미국이라니! 하긴 중국 갈 때도 내 인생에 중국이라니!라고 했었던 것 같다. 중국에 나갈 때 중국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처럼 미국 역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중국처럼 미국과도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어른들이 말하는 알 수 없는 인생이란 이런걸까, 안개에 갇혀있는 것 같기도, 짜증스럽기도 했다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모든 건 마음에서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빠르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다음 스텝은 좀 더 쉽게 나아갈 수 있다. 알 수 없는 길 위에 서 있다고 해도 내가 가려는 길만 똑바로 알고 있다면 그 목표를 향해 걸어가면 된다. 내가 언제 어디서든 뭘 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게 중요한 거다. 한국에 와서 제대로 배우고 싶은 것들이 있었는데 남편의 일정에 끌려다녀야하는 삶이 좀 화가 나긴 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뭘 할지 찾았기에 미국에 가더라도 계속 할 수 있다는 것.그리고 남편은 내가 안 간다고 해도 혼자라도 갈 사람이기에 모든 걸 체념하고 받아들였다. 남편은 미국 바라기로 신혼여행을 뉴욕 양키즈 스타디움으로 가고 싶어 했다. 언젠가 미국에 갈 날을 꿈꾸며 살았다 그렇게 오매불망 미국 가는 날을 기다리며 살았던 터라 결국 언제라도 갈 미국이었다. 기왕 가는 거 제대로 준비해서 중국에서처럼 잘 살아내고 싶어졌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빨리 가는 게 문제였다. 이제 중국어에 재미있어진 나는 매일 중국어에 매진하고 있었다. 거의 중국어에 파묻혀 지낸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아침에 중국 배우가 깨워주는 낭독으로 일어나고 중국차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고, 중국 SNS를 틀어놓고 운동을 하고, 하루 종일 중국 음악을 듣고, 중국 드라마를 보고, 중국어 레서피를 찾아서 중국음식을 만들어 먹고, 타오바오로 직구를 해서 매달 중국의 뭔가를 집으로 사들이고 있었다.
남편이 조선족이랑 사는 기분이라고 할 정도로 중국어에 애정이 생겼는데 갑자기 영어라고요? 흠... 중국어가 정말 강력해서 영어는 잘 생각도 안 날 지경인데 다시 A부터 시작해야 한다니 열정이 끊기는 기분이라 속으론 짜증도 났다. 이제 I'mean보다 我想이 더 편한데, 한국어를 들어도 바로바로 중국어로 번역될 만큼 중국어가 편해졌는데 영어로 바꾸려니 머리가 아파졌다. 베이징에서 만난 친구 아들이 말문이 열리는 3살쯤 베이징에 와서 입을 닫은 적이 있었는데 딱 그런 기분이었다. 막 말이 재미있어지려고 하는데 난데없이 새로운 언어가 공격해서 당황스러운 기분.
하지만 이렇게 시간을 버릴 수 없으니 미국 가서 살아야 하는 생존 능력을 키우기로 했다. 제일 중요한 건 언어 공부와 운전면허증! 나에게 해외 생존 능력이 1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마흔 살에 따 보는 운전면허증이라니!! 마트에 가려면 고속도로를 타야 하는 말에 정신없이 운전면허증을 신청하고 잃어버린 영어의 알파벳을 찾아 온라인 인강으로 알파벳의 순서를 찾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나의 언어 스킬을 올려주는 것은 덕질인데, 아무리 눈 씻고 봐도 영어권 스타들에겐 눈이 안 간다. 딱 한번 영어권 스타를 좋아한 적이 있는데 15살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빠져서 매일 영화 잡지를 봤던 적이 있다. 그땐 스스로 번역할 생각보다 번역해준 잡지가 나오는 날을 기다려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레오의 영화도 비디오로 사고 그랬는데 왜 번역에 그토록 의존했는지 아쉽기만 하지만 그는 이제 변했고, 내가 좋아하는 레오의 모습은 딱 토탈 이클립스까지였다. 레오의 리즈시절을 뛰어넘을 누군가가 필요하다! 요즘 주로 하는 일은 내가 덕질할 수 있는 스타 찾기? 와 온라인 영어 인강으로 잊어버린 알파벳을 맞춰보는 일이다.
나의 언어 공부는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 난 아직도 중국어를 잘하고 싶고, 한 손엔 중국어를 놓지 못하고 있다. 어정쩡한 중국어와 다시 시작해야 하는 영어. 둘 다 잘 해내지 못하겠지만 어쨌든 둘 다 잘 해내고 싶은 아이러니한 감정에 놓여있다. 중국어로 친구를 사귀고 싶고 영어로 일하고 싶달까. 둘 다 잘한다고 해서 내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의 맛에 빠지면 중독된 것처럼 헤어 나오기가 힘들다. 끊임없이 호기심을 자극하고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자연스레 혀가 기억해내기 때문이다. 공부는 대학교 이후로 안 할 줄 알았는데 사회에 나와보니 더 많은 공부가 필요했고, 결혼하고 이제 좀 쉬어볼까 했더니 중국어가 그토록 못살게 굴더니 이제는 중국어+영어라니! 전 영어나 중국어가 아니고 디저트 공부하고 싶단 말이에요;; 저도 제가 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나의 미국살이는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겠지만 내편님과 함께하기에 불안함을 잠재워본다. 남편이 성장하는 것처럼 나 또한 중국에서처럼 몰랐던 내 모습을 찾길 바란다. 그리고 중국에서처럼 내면이 단단해지고 삶의 바람을 탈 수 있길. 곱게 나이가 드는 방법과 여유와 베풂의 삶을 배우고 오고 싶다. 미래를 판타지라고 부르는 것은 이렇게 맘껏 꿈꿀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 언젠간 중국어와 영어를 정복하길 바라며
삶은 여행, 어디서든 여행하듯 살아가는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어요
이번엔 미국에서 생활여행자로 살게 되었습니다